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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13:50 ~ 14:7)

목사님 0 930

    

 

 

     요즈음 우리들은 이사야서를 같이 읽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1-39장, 40-66장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전반부는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후반부는 회복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판과 회복.

신명기사관이라고도 하는데 죄를 짓고 징계, 회개하고 용서.

그러니까 성경은 심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 후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계시록이 두렵지 않은 것은 그 환난 속에서 예수를 믿어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여러 가지 어렵겠지만 인간은 항상 승리.

며칠 전 맘모스 무덤이 떼로 발견되었는데 인간들이 잡아서 보관한 장소로 추정된다고 해요. 인간이 이겨요. 인간은 하나님이 존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통계청에 의하면 평균 80.2세인데

남자는 77.4세, 여자는 무려 84.6세로 발표되었습니다. 

이렇게 평균수명이 늘어나다보니 전에는 60세만 넘어도 장수한다고 해서 

환갑잔치를 성대하게 했지만 요즘 환갑잔치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100세를 넘겨 사시는 분들도 TV 등에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답게 살다가 가야지요, 치매, 노망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다 갔으면 좋겠다.

아무리 건강해 보이는 사람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는 죽더라도 그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삶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영생이요 다른 하나는 영벌입니다. 

영생은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고 영벌은 지옥에 들어가서 사는 것입니다. 똑같이 영원히 사는 것이지만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고 지옥에 들어가서 사는 것은 영벌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왜냐하면 이 땅 위에서의 삶은 유한하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누가 지옥에 들어갈 것인가? 

사도행전 4:12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저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착하게 살자, 선하게 살면 천당에 간다, 그래서 종교가 다 그게 그거라고 이야기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있고,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고 천국 갈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제일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농사의 기본이 봄에 씨 뿌리는 겁니다. 땅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14 “그런즉 그들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는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먼저 예수를 믿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 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시편 126편 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126편 5절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목회자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 전부 목회이야기입니다.

저는 참 행복한 목회자입니다. 가서 말씀들 나누는데 저만큼 교인들에게 

불만이 없는 목회자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사님들을 비롯해서 모든 교인분들에게 감사. 

 

감사찬양

 

어떤 목사님의 간증, 10년 동안 같이 산 제 옆집 사람이 종교가 뭐냐고 물어봐서 많이 당황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바르고 진실하게 양심적으로만 살면 굳이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지 않아도 저절로 전도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아무리 내가 바르고 진실하게 양심적으로 살아도 사람들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을 모른다면 그들이 나의 삶을 통해서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할 것이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의 제자임을 그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또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더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예수를 당신도 믿으라고 하셔야 복음의 열매가 맺어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4:48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시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로 그 교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전도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어떤 핍박이나 환난도 불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전도자들의 앞줄에 바울과 바나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그곳의 이방인들은 복음을 기쁘게 받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49절을 보면 복음이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그렇게 쉽게 되지만은 않습니다. 

본문 50절과 51절을 보면  

그런데 52절을 보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신앙의 신비입니다. 핍박 받아 쫓겨 가면서 기뻐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음 선교지로 택한 곳은 이고니온이었습니다. 

이고니온은 안디옥에서 동남쪽으로 140km 떨어진 곳으로서 현재는 터키의 코냐라는 곳인데, 1절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복음은 전하기만 하면 반드시 믿는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전도할 때 새신자를 전도의 열매로 주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두 사도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갈라디어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여러분, 사도 바울에게 정말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까?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그 당시 대석할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바리새인으로 엄격한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2절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전도 사역이 방해 없이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이곳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의 집요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전도의 반대급부는 핍박입니다. 

여러분들이 전도하려고 하면 복음 전도의 현장에서 반드시 박해하는 세력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우리에게 팔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전도의 반대급부는 핍박이요 박해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당한 분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핍박을 통해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예루살렘에 핍박이 몰아치자 복음은 시리아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시리아 안디옥에서 구브로(사이프러스)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에 박해가 오자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가지고 이고니온으로 왔습니다. 

결과적으로 박해 때문에 이고니온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본절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은 ‘설득되지 않은 유대인들’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깝습니다. 

복음을 열심히 전했는데 모두가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안 믿는 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고 그들로부터 무서운 박해와 핍박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자 온 동네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뉘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복음이 지닌 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복음이 세상에 평화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복음이 믿는 자와 세상을 가른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3절 

주님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를 위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로 하여금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표적과 기사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모두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각종 표적과 기사들이 많이 일어났음을 시사해줍니다. 

주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상급으로 주셔서 그들을 격려해 주셨고, 더욱 힘차게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41:15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같이 만들 것이라”

가평에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런데 옆집에서 높이 3-4m 높이의 옹벽을 쌓아서 우리 집을 훤히 들여다 보게 되어서 하지 말라고, 진행 군청에다 신고, 별일 아니다. 

하나님께 간구, 대전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그때도 성경일독. 

말씀을 받고 하나님이 하시겠구나, 시간은 걸렸지만 그 분이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전도의 결실을 맺게 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도자는 복음을 전하지만 결실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실상 전도자의 몫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시고 감동시키실 자를 감동시키십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그가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태도는 그렇게 성실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의 결실은 다른 어느 곳보다 그곳에서 넘쳐났습니다. 그러면 그 기적이 요나로부터 비롯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니느웨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불성실한 전도를 통해서도 회개하게 

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나의 언변으로 사람을 설득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전도자는 단지 사람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으로 초청하는 자일 뿐이요 말씀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전도자의 삶을 사십시오. 이 땅에서도 주님은 표적과 기사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려서 풍성히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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