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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히 잡고 있으면 (히브리서 3:12-19)

목사님 0 19

<!--StartFragment-->이번 주 금요일은 574번째 맞이하는 한글날입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 글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브라질이 축구는 잘하지만 포르투칼어를 씁니다. 

그 외의 남미국가들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훌륭한 조상들의 덕분에 한글을 가지고 있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국어를 씁니다. 민족이란 같은 언어를 쓰는 집단.

한국어 금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오늘부터 한국어는 사용할 수 없다는 지시가 내려온다면 어떤 심정이 들까? 그런데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제는 조선 땅을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동화정책을 시행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어로 말하게 하고, 천황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천황의 신민으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조선의 정체성은 소멸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조선어와 조선 글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조선 역사와 문화의 정수였습니다.

1929년에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우리 말을 보존하려고 노력.

발기인 108인은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를 정리하고 통일하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 선언하면서, 사전을 만듦으로써 민족어를 보존하고 문화의 기초를 세워 독립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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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독교와 한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당시 한글 보급 전파의 일등공신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국내의 기독인 학자들이었습니다. 

1893년 1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 인쇄한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후 1911년 신구약 전체가 한글로 번역돼 ‘성경젼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서울 연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를 지낸 게일 선교사가 1909년 기고한 글에는. “이런 문자(한글)가 400년 동안 긴 잠을 자다가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이후 교회에서도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지시했지만 

교인들은 계속 한글 성경과 찬송가를 사용해 예배들 드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복받은 민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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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하면 우리는 보통 좋은 집, 좋은 차 같은 복된 환경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복이라는 것이 어떠한 환경이 주어지기만 하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관심은 그런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된 사람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복된 사람이란 어떠한 여건에서도 어디서든지 스스로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좋은 음식이 주어지는 것과 좋은 입맛, 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저는 입맛 쪽을 택하겠습니다. 

입맛만 있으면 어떤 음식도 좋은 음식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없어서 못 먹는 사람보다 있어도 못 먹는 사람이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입맛이 좋겠습니까? 일하는 사람이라야 입맛이 좋습니다. 노동을 하는 사람,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음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 

자다 일어난 사람한테 무슨 입맛이 있겠습니까?

건강해서 일합니까? 아닙니다. 일해서 건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벌어야지요. 

땀 흘려서 내 손에 넣을 때, 거기에 뿌듯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재벌 아버지가 자식에게 많은 돈을 물려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돈을 벌면서 얻은 행복만은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알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공부해야 합니다. 스스로 공부하면서 깨닫고 즐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복이 있고, 복된 길로 향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 복을 즐길 수도 없고 복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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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40일 동안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이 와서 시험을 합니다. 그 시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줄 테니 내게 절을 해 보아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에서 사단이 애써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쉽게 얻으라는 말입니다. 뭐 힘들게 수고할 필요 없다, 쉽게 얻어라. 

우리도 쉽게 가라고 하는 시험을 얼마나 많이 받습니까?

그러나 성공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공부에도 왕도가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행복으로 통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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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을 보면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사이의 사랑과 친목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나와 하나님 사이에 바른 관계를 맺어 주시기 위하여 오심.

성경에서 말하는 악한 마음이란 믿지 아니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19절에서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29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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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오늘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오늘의 종교입니다. 

여러분, 지금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몸이 아프고 쑤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세포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세포는 감각이 없습니다. 

아픈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 은혜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들려오는 것도 은혜이지만, 내 마음에 번민이 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이라고 하는 순간, 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 시작하셔야 합니다. 

‘조금 더 있다가’ ‘이것만 끝나면’ ‘이 다음에’ ‘이 다음에’ 하는 동안 다 틀려 버리고 맙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누구를 도울 때에도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한테는 일생을 통하여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기회를 놓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라 버린 것입니다. 

좋은 기회들, 그 귀한 가능성들이, 내게 주어졌지만 내가 그만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 스스로 모두 거절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몰랐다’고 변명을 합니다. ‘환경 때문에’라고 변명도 합니다. 그러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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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건강을 잃는 것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먼저 적신호가 옵니다. 이때야말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적신호를 보고서 이런 때에는 좀 쉬어야 한다, 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건강을 지킬 수 있게 먼저 기회를 준다는 것이지요. 

이 한계를 넘어서면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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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아가라 폭포 상류로 올라가 보면 그 밑에 폭포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넓은 강, 넓은 호수로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는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물 흐르는대로 그냥 떠내려가다가는 폭포 밑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경고하는 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말뚝을 박고 붉은 깃발을 띄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세 차례나 길게 죽 이어져 있습니다. 

1차 경고선까지 오면 노를 저어서 다시 상류로 올라가야 합니다. 

거기서는 쉽게 노를 저어서 상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경고가 나타납니다. 거기까지 흘러 내려오면 다시 올라가기가 조금 힘들어집니다. 그래도 아직 올라갈 수는 있습니다. 

두 번째 경고를 그대로 지나치면 세 번째 경고에 도달합니다. 

그 경고마저 넘어서면 이제 아무리 노를 저어도 소용없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물살에 휘말려 들어가서 배도 사람도 그 무서운 폭포 밑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한계선이 있듯이 기회에도 한계선이 있습니다. 

이 한계선을 넘지 않도록 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영부영하다 그 한계선을 넘어버리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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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피차 권면하여’

대면예배와 비대면예배의 차이점을 실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무디는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입니다. 그는 학력이 일천했지만 하바드에 가서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때 나온 질문이 “꼭 교회에 가서 예배 드려야 하느냐? 나는 나쁜 짓 하지 않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도 열심히 한다”

그때 무디가 말하기를 “혼자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자에게는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하면서 석탄의 비유를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석탄도 하나씩 띄어 놓으면 금방 죽어 버립니다.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도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면 신앙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지 않고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면 신앙 생활이 나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자라도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면 뜨거워집니다.

그의 믿음이 날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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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합니다. 

완고함이란 헬라어로 ‘스클레뤼노’입니다. 여기에는 ‘굳어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점점 굳어집니다. 굳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합니다. ‘굳어지지 말아라, 경화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굳어지기 직전까지 인간이며, 자유인이며, 인격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완고하게 됨을 면하라’고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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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하게 되면 제일 무서운 것이 하나님의 버리신 바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24, 26, 28절 세 절에 걸쳐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8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영어 성경에는 ‘God gave them up’으로. 포기를 해도 그냥 포기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끗이 포기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버림 받았다고 해서 당장 벼락 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 버림 받은 인간의 모습을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위를 두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악령에 사로 잡혀 어쩔 줄을 모릅니다. 급기야는 사위를 죽이겠다고 정면으로 창을 내던지기까지 합니다. 

끊임없이 뉘우치고 번뇌하면서도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 헤맵니다. 

이것이 버림 받은 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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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우리들이 불의의 길을 갈 때에는 그 길이 막혀야 합니다. 

악한 길이 성공한다면 그는 버려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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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결론입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행복한 순간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삶이 기쁨의 연속이라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사는 고난의 연속이지만 우리들의 삶은 눈물의 연속이지만

내게 부르짖으면 슬픔 많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이 믿음을 견고히 잡고 이 땅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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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나의 영적 현주소가 어디이며, 내 심령이 어떠한 상태에 있습니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내 심령 상태를 재점검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자녀됨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 그 은혜의 자리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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