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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고백 (요한복음 3:26-30)

목사님 0 838

  

   

    에피쿠르스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인간의 욕구를 세 가지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첫째가 의식주의 욕구, 먹고 입고 생활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라서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성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어떤 의미에서는 참을 수도 있는 욕망이라서 이걸 잘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해진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이 세 번째 욕구입니다.  

그런데 이 욕구의 문제점은 채울 수 없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이건 절대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불행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욕망 중의 가장 무서운 욕망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 29절을 보면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쁨, 이것이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사람들이 우 몰려서 예수님께로 가더라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고자질을 합니다. 요한으로서는 질투가 날 수 있는 사건인데 오늘 세례 요한은 그것을 잘 극복합니다. mind control,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평안이 있습니까? 

마음이 평안치 않은 것 중의 대부분도 질투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인간 망가됩니다. 아주 추해집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야바가 누구입니까? 대제사장 즉 종교지도자입니다.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당대의 유명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왜요? 자기들보다 못 배우고 무식해 보이는 예수의 말을 사람들이 더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 질투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 질투가 작용 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죽였다 이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마음도 따지고 보면 질투입니다. 

‘예수심리학’이라는 책은 예수님의 심리를 분석한 책인데 그 책에서는 

그러면서 예수님을 닮으려 하면 세 가지를 본받으라고 충고합니다. 

잘 웃고, 칭찬을 받아 들이고, 칭찬을 하라가 그것입니다.  

 

잘 웃어라, 그렇습니다. 남이 웃길 때 잘 웃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이 웃길 때 시무룩하고 웃는 남까지 비웃습니다. ‘뭐가 우습다고’ 이런 사람들은 구제불능입니다. 

노예한테는 웃음이 없습니다.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불평하고 감사가 없으면 노예입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구별하는 단어는 감사라고 합니다. 

공산주의의 기본은 혁명입니다. 혁명이란 말 자체의 개념을 상고해 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러한 철학을 근거로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고생하는 것은 부르조아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다 없애야 한다. 이것이 혁명의 철학입니다. 

혁명하는 사람치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는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잘 웃으려면 어찌해야 됩니까? 자기 고집을 버려야 웃을 수 있습니다. 그냥 우스운 이야기가 있거든 그리로 끌려 가십시오.

 

그리고 칭찬을 잘 받아 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이 나를 칭찬하는데 잘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의 열등감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칭찬하면 비꼬지 말라고 합니다. 

 

또 남 칭찬을 많이 하라고 합니다. 정 칭찬하고 싶지 않거든 칭찬할 때 ‘me too’라도 하라고 합니다. 고거라도 하십시오. 

남 칭찬할 때 꼭 깎아내리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건 망조입니다. 

칭찬하라, 칭찬에 동조하라. 이게 중요한 겁니다. 칭찬하는 순간 내 마음에 치유가 일어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늘 세례 요한은 멋지게 해결합니다. 

27절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아 얼마나 멋있는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 잘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 하나님께서 주셨구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깎아 내릴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 일입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었든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신 것입니다. 

누구 원망하지 맙시다. 탓하지 맙시다. 질투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입니다. 하늘이 내신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도 하나님께서 주신 바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왜 불공평하냐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왜 저 사람에게는 주고 나는 안 주냐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는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 요한의 마음은 꾸준합니다.  

사람이 변덕을 부리면 안됩니다. 

세례 요한은 원래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온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인기가 높아져도 세례 요한은 이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내 위치가 있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행복의 비결이란 한계를 설정하는 것, 즉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요기까지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요기까지다, 내가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요기까지다, 내 나이가 지금 얼마다, 한계입니다. 

부에도 한계, 명예에도 한계, 건강에도 한계, limitation, 한계를 스스로 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걸 넘어서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욕망은 자꾸 over하려고 합니다. 

더 할 수 있는 것처럼, 더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아닙니다. 

성형수술. 김태희, 송혜교.  

 

특별히 오늘 말씀에는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내가 장가가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신랑 좋은 날이지만은 내 친구인 신랑이 기뻐하니까 나도 좋은 것입니다. 이 마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신랑이 행복하니까 내가 행복하고 그가 출세하니까 내가 출세하는 것 같고, 그가 기뻐하는 순간 더불어 기뻐하는, 이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잘 될 때 ‘아 잘 됐구만, 그 사람 그 동안 어려웠는데 참 잘 됐네’ 그런 마음 가져 보았습니까? 

누가 성공했다고 할 때 ‘참 잘 됐구만’ 그래 보았습니까?

대체로 그렇질 못합니다. 배가 아파진다고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퍼진다면서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 병 때문에 다 죽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기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높아지는 걸 보며 세례 요한이 기뻐하고 신랑이 장가갈 때 그 친구가 같이 기뻐하고...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속에 기뻐하라는 말씀이 열 세 번이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삶의 초점을 맞춘 사람들은 기뻐하는 이유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들은 효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효도란 무엇입니까?

부모들이 해 준 것만큼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부모들의 마음은 자식들의 행복입니다. 

자식들이 기뻐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명령입니다. 

신앙인의 기준의 첫 번째가 바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 좋다는 제일 기준을 기쁨에 둡니다. 

그런데 기뻐하는 것은 소유나 성취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죄요, 내가 받은 것은 다 은혜입니다.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죄사하심 받은 자의 감격에 삽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바로 그런 마음, 더불어 하는 기쁨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해가 나면 밤에 빛나던 달과 별이 물러가듯이 물러나는 기쁨입니다. 

나는 내 할 일을 다하고 물러가노라.

왜 나에게 기쁨이 없습니까?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요즈음 깨끗한 물을 마셔야 된다고 해서 정수기 광고가 극성입니다마는 

아무리 좋은 거다 비싼 거다 해도 제일 중요한 것은 물을 마주하고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물의 정수는 필터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수하겠다고 정수기 열심히 갈아치우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물을 마주한 우리의 마음이 물을 생명수로 만들 수도 있고 사약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집안에서 아내, 엄마들의 마음 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 아기가 건강하게, 밝게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속상한 상태에서 젖을 먹이면 아기가 부정적으로 어둡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정말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욕망을 다스리고 이제는 시기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깨끗한 마음으로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살아갑시다. 

그 기쁨과 행복, 이것은 파동을 일으키고 파급효과를 냅니다. 

그래서 공명을 일으킵니다.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 기쁨 속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 세상 잘 되는 일이 있으면 다 같이 축하합시다. 그게 다 내 기쁨입니다. 이런 호방한 마음을 가지고 참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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