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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축복 (말라기 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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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담임목사의 동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주 월, 화에는 수유리 한신 신학대학원에서 기장신학대회에 참석을 하여 많은 깨우침을 얻었고, 수요일 새벽에는 양재온누리교회에서 ‘말씀과 순명’이라는 목회자들의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에 참석하여 다같이 나라를 위하여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6가지 기도제목.

 

오늘 설교 본문은 월, 화에 있었던 기장신학대회를 통해서 받은 도전.

우리 교단이 이렇게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움추러드는 이유는 민주화 

운동에 몰두하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목회자는 힘들더라도 성도들에게  바로 가르쳐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십일조에 경제적인 축복의 길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경기가 나빠지고 있는 이때에 십일조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을 넘어서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비정한 사람의 말같이 들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과 상식이 어떻든지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일조의 기원은 창세기 14:20 아브라함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의 1/10을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드리는 데서부터입니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두 번째가 창세기 28:22의 야곱의 서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그 후 십일조는 모세 이후 레위기를 통하여 체계화되었습니다. 

율법시대의 모든 백성은 그들의 소산의 1/10을 드렸습니다. 

이 십일조를 ‘첫째 십일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첫째 십일조를 제외한 9/10에서 다시 십일조를 떼어 하나님께 감사 축제를 드리는 데 사용했는데, 이것을 ‘제2의 십일조’ 또는 ‘축제 십일조’라고 부릅니다.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3년과 제 6년에는, 이 둘째 십일조를 나그네, 고아, 과부와 같은 사람들을 돕기 위한 구제 사업에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이러한 근거에서 교회는 십일조의 생활을 지켜왔고, 이 십일조는 교인들의 믿음을 가늠하는 중요 요인이 되었습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구체적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라기 예언자의 말씀을 통하여 십일조의 의미를 되새기고 바른 신앙을 찾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입니다. 

말라기서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한 후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를 이제 성전 건축만 끝나면 하늘로부터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긴장을 풀고 보니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라기서 1장을 보면 눈먼 것, 병든 것을 가지고 나와서 예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그 당시 어려웠던 경제 사정으로 인해 온전치 못한 제물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2장을 보면 그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겠다 라고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3장을 보면 ‘돌아오라! 돌아오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돌아오라는 애절한 하나님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들립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경제파탄에 빠져있는 

전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돌아오라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너희가 먼저 돌아오면 내가 돌아가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라. 무릎이 닳도록 엎드려서 기도해라. 그럴 것 같은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참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십일조를 떼어먹었다고 지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백성들아 회개하라 해 놓고 왜 돈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말라기서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돈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 인격,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운동 선수가 되려면 기본 자세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초를 배울 때 제대로 배워야 좋은 운동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출발할 때 기본부터 잘 배워야 합니다. 

성경연구가들의 말을 빌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7가지 비유 가운데 무려 17가지가 재물에 대한 비유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재물이라 되어있습니다만 원문에서는 맘몬, 돈 귀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드리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영적전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 버는 것은 재주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것은 재주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돈을 어디에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고 인격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하늘백성과 땅의 백성들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호주머니를 우리가 다스리기 전까지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침례교인들이 강가에서 침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한 교인을 붙들고 물 속에 풍덩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목사님 잠깐만 제 호주머니에서 돈지갑 좀 꺼내 놓고요.”그러자 목사님께서 대답했습니다. “돈지갑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어 두시오. 당신과 함께 돈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네 시간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네 사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생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나다. 

하나님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청지기다. 너희들이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징표가 있어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다’ 그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선언 없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버리고 말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함께 걸머지게 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Representative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대표성의 원리가 여러 곳에 적용됩니다. 먼저 시간의 대표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이날은 대표적인 날입니다. 오늘 주일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은혜 받고 살아가면 월화수목금토주일까지 살아가는 모든 삶이 성결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일을 내가 함부로 즐기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인가 한 번 물어봐야 합니다. 주일을 버린 사람은 예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의 대표입니다. 내가 쓰는 모든 물질의 대표성이 되는 것입니다. 종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소중히 잘 지키면 우리가 쓰는 모든 물질들이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는 온전하게 드려야 합니다. 타협하면 안됩니다. 

내가 얼마를 드릴까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와 있습니다. 

여기 강조어가 “온전한”입니다. 타협하지 않은 십일조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자기 교회에다 바쳐야 합니다. 내가 꼴 먹는 그 자리에 바쳐야 합니다. 내 영혼을 위탁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몸 된 집, 바로 그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로로 선교헌금 내기도 하고, 이웃을 위해 구제도 하는데, 이것은 십일조의 주인이, 물질의 주인이 자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십일조든 헌물이든 선교든 구제든 자기가 직접 하는 것은 자기 사업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십일조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 9절에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십일조 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지 않은 곳은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 영혼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문제는 신앙적으로 환경적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십일조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십일조가 얼마나 큰 기쁨이고 즐거움인가는 해 보신 분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십일조를 결단하면 깜짝 놀랄 일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 십일조 뗄 때에 내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서 놀란답니다. 

그런데 아홉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풍성한 것을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하다 보면 십일조가 기쁨이 되어 교회에 달려나가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국민일보에도 션 부부는 십의 이조. 션이 기도문처럼 외운다고 하는.

“완벽해서 나누는 게 아닙니다. 완벽하려고 나누는 것도 아닙니다.

부족하고 자격없는 저같은 사람을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자녀로서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 나누며 살아갑니다.

가진 게 많아서 나누는 게 아닙니다. 더 많이 얻고자 나누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빚진 자 되었기에 그래서 나누며 살아갑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십일조는 성경에 있는 물질에 대한 승부수입니다. 

그냥 듣고 흘리지 않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실천한다면 틀림없이 승부수가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고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들의 삶이 언제나 형통하며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가 이해가 좀 안되도, 힘들고 어렵고 무거워도 순종해야 합니다. 좁은 길로 가라면 좁은 길로 가야하고 100살에 낳은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하여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의 상식과 세상의 꾀가 아니라 말씀으로, 말씀을 믿음으로 승부하여 

그리하여 열린 하늘 문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임하는 신령한 복을 받아 

이 힘들고 유혹많은 이 세상에서 마침내 승리케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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