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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는 길 (빌립보서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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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유럽 최초의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들어가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드릴 회당을 찾았는데 회당이 없어 조용히 기도하려고 강가로 나갔다가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 전도하게 되고, 그러자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그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됩니다. 요새말로 하면 가정교회인 셈입니다. 

유럽 최초의 교회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건물을 세우고 시설을 갖추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이 빌립보 교회에 위치한 마게도냐 지방은 여인들의 위치가 좀 특별했던 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마게도냐 지방은 모계사회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이른바 부계사회인데 마게도냐는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모계사회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인이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그 부인을 사랑한 나머지 남편들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열녀비는 있으나 부인이 사회를 위해 큰일을 했다고 공덕비를 세워주는 예는 없습니다. 그런 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역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것입니다.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된 빌립보 교회는 모름지기 여성 주도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전체 교인 가운데서 소위 지도자급에 속한 분들이 여성입니다. 

따라서 그에 따른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었습니다. 

우선 여성 특유의 장점인 사랑이 넘쳤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장점이라 하겠습니다. 상부상조가 잘되고 봉사정신이 두드러졌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자 다른 교회에서는 ‘또 갇혔나 보다’ 생각하고 기도만 했지만 빌립보 교회는 여성 특유의 그 따뜻한 모성애를 발휘합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자 ‘얼마나 춥고 배고플까, 얼마나 불편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헌금을 모아 한 겨우내 바울을 잘 돌보아 달라고 위로금을 로마로 보냅니다. 

이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빌립보 교회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가 승했다는 것은 큰 단점이었습니다. 

이 시기와 질투가 분쟁의 씨앗이 되어 파벌이 생기고 서로 양보없이 맞서 서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가장 큰 문제거리는 바로 이런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 마귀는 갈라 놓는 영입니다. 어떠하든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도 가정도 교회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선한 일에까지 찾아드는 죄입니다. 악한 세계에만 시기와 질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데도 있고 믿는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거기에도 시기, 질투는 따라 다닙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마귀가 시험하는 것 중에 레벨이 높은 시험에 속하는 것입니다. 혹시 생각하시기를 세상이 문제가 많으니까 ‘그러면 내가 첩첩산중에 가서 살아야지, 하거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만 하면서 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실 줄 모르지만 거기에도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내가 유오디게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의 문제점은 시기와 질투요 거기 따르는 분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쩌면 이 편지에서 ‘너희들 그러면 못쓴다’라고 하고 싶었을 것이지만 굳이 아픈 데를 찔러서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당장에는 책망하고 싶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암시적, 창의적인 방법을 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극장에서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막이 오르기 전에 사회자가 바라보니 청중석에 한 할머니가 모자를 벗지 않은 채 앉아 있습니다. 금연, 탈모

‘저 모자를 벗게 해야 되겠는데...’ 궁리를 하던 사회자가 기지를 발휘합니다.

‘오늘부터 당 극장에서는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모자 쓰시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그 즉시로 모자를 벗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높은 차원에서 그들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왜들 싸우고 야단이냐, 그러면 못쓴다’라거나 누구는 잘했다 누구는 못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마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분명히 누군가가 잘못했고 누구는 조금 더 잘했겠지만 이것을 전혀 가리지 않고 사도 바울은 다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하나되라’ 이렇게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들이 교회 분쟁의 양대 세력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둘이 버티고 있는데 이제 사도 바울은 조심스럽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충고 가운데 하나 되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생활을 같이 하라, 사업을 같이 하라는 등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 되라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면서 ‘주 안에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마음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가지려 한다고 해서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구심점이 있어야 합니다. 

수평적인 관계에 앞서 수직적인 일치부터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주님을 사랑하고 부인도 주님을 사랑한다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앉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다 같이 교회에 나가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는 어떻게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아무리 같이 살고 별일을 다 한다 해도 신앙적으로 하나 되지 못하면 이것은 하나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만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수직적인 사랑을 떠나서는 일치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이지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만날 때마다 반갑습니다. 가까이 지내다보면 부모형제보다 더 밀착됩니다. 

여러분이 오늘이라도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한다면 진정으로 기도해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심으로 당신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 줄 사람은 집사님들과 셀리더들 아니겠습니까?

왜? 성도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사업 관계니 이해 관계니 동창 관계와 같은 세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신앙적인 고백에 기초한 이러한 관계야말로 가장 절실하고 강한 유대 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되고, 이 구원받은 간증 안에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라고 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메고 같이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 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 ‘멍에를 같이 했다’는 말은 본디 부부간을 이야기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을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에는 저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또 3절에서는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자”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 초기에 교회 설립을 위해 모두가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감옥에도 가게 되고 매도 맞고 그러다 보니 기도도 많이 하고 헌신도 아낌없이 하였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날 협력하여 이루어 놓은 거룩한 사업과 업적을 생각할 때 오늘의 사소한 문제들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지난 날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 전파에 한 마음으로 힘썼다는 그런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 될 수 있다고 바울은 그 비결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도우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협력하는 자세로,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대체로 분쟁하고 시비를 벌일 때면 사람들은 대부분 소극적이 됩니다. 

나쁜 말로 하면 ‘될대로 되라’는 자세입니다. 

깨질테면 깨져라, 망할테면 망해라 하고 관망합니다. 

교회에도 적극적인 참여자가 많을 때 서로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에는 소망이 보이고 있습니다.

성경 일독에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하늘 교회 단체카톡방에 매일 성경을 읽고 다 같이 참여를 합니다.

굉장히 좋은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또 수요 예배에는 이제 직장인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그러자 우리 교인들도 부지런히 수요예배에 참석들 하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이탈자가 없어야 합니다. 

좋은 계획을 세웠다가도 이탈자가 생기면 풍선에 바늘로 찌르는 것과 같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올해에는 우리 교회 모두가 적극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고 같이 이끌어 주어서 부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다 이것이 과연 덕이 되는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우리 교회를 위해서 유익한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저를 돕도록 하라, 약한 점도 돕고 그가 하는 일에 협력하는 자세를 취하라, 이렇게 할 때에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인식입니다. 믿는 우리들은 천당 가면 서로 만나야 할 사이요, 오늘 보고 그만 둘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생명의 면류관은 나만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주실 것이니 그때 만나자는 종말론적인 친교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성도의 교제란 이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 사람과는 이 세상에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만납니다.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러니 지금 내 기분에 맞느니 맞지 않느니, 네 의견이 나쁘다느니 틀리다느니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함께 생명책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간 믿음의 조상도 만나야 되겠고 그리고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도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늘나라에 가서 또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합니까? 멍에를 같이 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종말론적인 친교의 의미를 재확인할 때에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기쁘게 자발적으로 참여케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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