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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 (창세기 3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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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불행은 행복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면서도 그것을 찾아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도 막연히 그것을 추구하면서 온 생을 바칩니다. 여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를 다만 시간 시간 경험해 가면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행복이었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남겨진 시간이 없습니다. 아마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다 그대로 죽어가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2019년도 거의 다 갔습니다. 이제 잘 마무리를 해야 되는 시점에 왔습니다. 

오늘은 야곱을 통해서 인생의 행복에 대하여 같이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야곱의 일생은 축복을 쟁취하고자 애쓴 생이었습니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나 형의 축복을 탐낸 사람이요, 끝내는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챈 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노력도 참 많이 하였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복 받기 위하여 복 받지 못할 짓도 서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복을 추구하는 데에 야곱처럼 집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이 130에 바로 앞에서 한 자기소개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창세기 47장을 보면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에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묻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백삼십 년과 험악한 세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복을 쟁취하고자 애썼던 야곱을 생각하면 

“아 130년을 살고 보니 그래도 얻은 게 많습니다.”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멀고 험한 이 세상 길

 

야곱이 생각했던 복의 개념은 야곱의 삶의 자리에 따라 변합니다. 

처음에는 장자가 되는 것이 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형이 받을 축복을 속임수로 가로챘기 때문에 결국은 형의 증오를 사서 집을 떠나 하란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외가집이 있는 하란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노숙까지 합니다. 

광야에서 혼자 밤을 지내는 것은 위험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도무지 살아남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이란 살아 남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복은 살아남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외가가 있는 하란에 도착하여 외삼촌 라반을 만납니다. 

거기서 그는 아리따운 여인 라헬을 만나 반하고 맙니다. 

야곱은 또 다시 생각했을 것입니다. ‘라헬과 결혼하는 것이 복이다’라고.

그리하여 라헬을 아내로 취하고자 라반 밑에서 7년 동안 봉사를 합니다. 

7년이 짧지는 않지만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9:20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그러나 7년이 되는 날에 그가 아내로 맞은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외삼촌 라반과 야곱의 수싸움.

그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다시 라반에게 7년 동안 더 봉사하기로 합니다. 

결국 14년 동안의 머슴살이를 통하여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라헬을 사랑했던지 그녀와 결혼만 하면, 그녀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라헬과 사는 것이 진정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와의 생활도 그리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지나친 질투심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라헬과의 결혼도 진정한 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으로 야곱이 생각한 복의 개념은 물질이었습니다. 

부가 곧 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열심히 일을 합니다. 

재산을 모으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여 마침내 큰 부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처갓집 식구들에게 그 부로 인하여 시기를 받게 되고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는 또 깨닫습니다. 

부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외가에서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그동안 모았던 재물과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딱 형 에서가 마음 속에 걸립니다. 

형 에서와 원수지고 하란에 와서 20년, 이제는 안정된 것 같은데.

야곱은 깨닫습니다. 형과 화목하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화평이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화평을 깨뜨리고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피해가도 평안을 찾지 못합니다. 야곱의 문제는 형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형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느 하늘 아래 가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형과 화평을 이루기 전에는 무슨 수를 써도 해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야곱은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 밤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문제 해결의 길을 하나님과의 독대에서 찾습니다. 이제는 미련도 소유욕도 버렸습니다. 야곱은 진정 고독한 순간에 홀로 하나님과 만난 것입니다. 

형 에서에게 쫓겨 하란으로 갈 때 만나주셨던 하나님께서 그 밤도 홀로 있을 때에 만나주십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은혜가 떠올랐습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거든요. 

하나님의 은혜로 하란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서 20여 년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큰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이제까지 은혜로 살아왔다면 미래도 은혜로 살 것입니다. 

이젠 불안해 할 것이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바로 믿었다면, 정말로 은혜의 하나님을 믿었다면 이제 와서 무엇을 불안해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착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심으로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착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받을 조건이 없지만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덕을 부리지 그 분은 변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천방지축 휘청거리고 쓰러지지만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야곱을 

사랑하시고 변함없이 은혜의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이 고민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불확실성’에 있습니다.

형님을 만나고자 하는 뜻을 전했더니 형님이 자기를 만나러 옵니다. 소식을 들어보니 4백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긴장이 됩니다. 주눅이 듭니다. 내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란 기껏해야 자녀들이요, 오합지졸들입니다. 

그런데 형 에서는 들의 사람이요, 전쟁의 사람입니다. 이런 지휘자 밑에서 훈련 받은 사람들, 즉 군대가 몰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형이 우리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불확실성 때문에 심히 불안합니다. 

부부 관계의 문제도 배우자의 마음을 읽지 못해서 생겨납니다.

내 속으로 난 자식인데도 그 자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비겁한 야곱이 아니라 가장으로서 당당한 야곱이 됩니다. 

 

야곱이 자신의 식솔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에서 앞에 나아가 절을 할 때 에서가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노력, 어떤 수모도 다 뒤로 돌리고 여기 이 자리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고백입니다.   

지금 야곱은 자신을 깨끗하게 포기했습니다. 모름지기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은 자기 입장을 포기할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 앞에 엎드려 일곱 번 절을 합니다. 여기에는 잘했고, 못했고 하는 어떤 변명도 없습니다. 20년 만에 형님과 만나는 이 자리에는, 이 순간에는 오로지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나아가 엎드려 일곱 번 절할 뿐입니다. 일곱 번 절한 이 사건 자체가 기도의 응답이요, 기도 가운데서 얻은 신앙적 용기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화평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로써 모나고 강팍하던 에서의 마음도 녹습니다.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형 에서의 얼굴을 마주하고 감격한 야곱은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것 같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야곱은 형님을 눈으로가 아닌 가슴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로 보였던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20년 동안 막혔던 담이 무너져 형제간의 화평을 찾는 순간,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뵙는 것 같은 엄청난 감격을 맞보게 됩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의 모습은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사도행전 7:60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돌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지만, 천사의 마음을 지녔기에 천사의 얼굴로 죽음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같은 화평이, 평안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이요, 신앙의 기적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화평함이 없이는, 용서함이 없이는 그 많은 기도도 다 소용없습니다. 허다한 선행도 소용없습니다. 화평이 먼저입니다. 

왜 얻고도 기쁨이 없고, 왜 성취하고도 행복이 없고, 왜 쟁취하고도 불안에 떨어야 합니까?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고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이 풍랑이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주시는 샬롬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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