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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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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있었던 사건은 에덴동산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에덴동산 사건의 초점은 아름다운 에덴동산, 낙원, 파라다이스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와 그 불행의 

원인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에덴동산 사건의 주제요 초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맞이하게 되는 장면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입니다. 

인간이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후 일어나는 첫 사건, 에덴 동편에서 맨 처음 벌어진 사건이 형이 친동생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참으로 수치스럽고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범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의 결과가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을 보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종교 의식을 중심으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정치 문제, 경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문제입니다. 즉 경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행위가 이지러지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살인 사건이 터집니다. 

칼 마르크스는 말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경제에 있으며 그 해결도 경제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여기 앉아 계신 분들 중에는 먼저 돈 문제,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신앙 생활 잘 해야지...

그러나 성경은 문제가 거기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그 경건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해결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적인 

태도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질 때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뱀 때문입니까? 선악과 때문입니까? 문제의 원인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거역하고, 믿지 아니한 나머지 일어난 결과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문제는 살인 사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살인 이전의 하나님 앞에 드린 예배가 문제입니다. 

그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는데 가인은 그 어긋난 관계를 바로잡을 생각은 않고 애꿎은 동생한테 화풀이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 친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맙니다. 가만히 봅시다. 원한, 화풀이, 서로 화해하지 못함.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다음에 

그 부작용으로 사람이 사람한테 화풀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입니다.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내가 실패하고, 잘못된 것, 불행하게 된 모든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마음보를 봅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신 화풀이를 아벨에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제사를 왜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잘 안되는 것이 다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가인 콤플렉스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단 둘뿐인 형제 사이에서 형이 동생을 죽여야 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 가진 것을 빼앗자는 강도질도 아니요 아벨이 형한테 원한을 살만한 죄를 저지른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죽였습니까? 그저 내가 내 속을 못 이겨서 엉뚱한 사람을 괴롭힙니다. 병든 심령이 발악하는 것입니다. 

내가 못사는 것이 남이 잘 살기 때문입니까? 나의 실패가 남의 성공 때문입니까? 왜 남의 행복에서 내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까? 

죄는 우리의 마음에서 평화를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질투로 발전합니다. 

분노하고 폭발합니다. 일을 터뜨리고야 맙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고요함이 없습니다. 이성의 판단이 흐려지고 총기가 사라져 비이성적인 인간이 됩니다. 더 나아가 폭력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런데 폭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육체에만 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폭력도 있지 않습니까? 기를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못된 말로 남의 상처를 건드려서 기를 죽이는 것도 폭력이요 더 나아가 

살인인 것입니다. 살인이 따로 없습니다. 여러분은 살인한 일이 없다고 하겠지만 실은 모르는 중에 우리가 무척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찔러서 그 사람 마음이 병들고, 끝내는 몸까지 병들어 죽어갑니다. 

살인적인 행위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는 자랍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자랍니다. 만약 죄가 성장한다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회개했더라도 아직 회개를 덜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병들은 잠복기가 있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도 얼마동안은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싹이 나고야 맙니다. 일단 싹이 나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내가 스스로 조정할 수 없게 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7절 ‘죄를 다스릴지라’고 말씀합니다.

‘다스리라’ 아직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다스리라. 한계를 넘어서면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술 마시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마셔버린다.’ 이와 똑 같습니다. 죄가 바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의 종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가 없어집니다. 

이제 죄가 주장하는데로 끌려가야 합니다. 

내 마음도, 감정도 생활도, 전부 죄가 다스립니다. 다 삼켜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이 과정이 아주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5, 6절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히브리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는 처음에는 손님과 같다. 낯선 손님처럼 나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내가 그를 영접하여 얼마동안 함께 지내면 그 손님이 급기야는 주인이 되고 만다’

죄지은 자마다 양심의 가책이 있습니다. 이 가책에 뒤이어 회개가 따라와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하려는 마음을 회개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은 마귀적인 것입니다. 죄는 인간이 짓지만 회개 못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일입니다. 

나 혼자 있을 때에는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그런데 머뭇거리며 생각하는 동안에 그 마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회개의 믿음이 필요하고, 회개의 용기가 필요하며, 회개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이것을 가로 막습니다. 

‘죄인이 어디 너뿐이냐? 죄지은 것이 네 탓이냐? 사회 탓이지, 누구 때문이지’ 하면서 핑계하고 정당화시켜 회개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인처럼 점점 분하고 안색이 변하여 큰 사고를 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성경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경이 변해야 하고, 멀리 가야하고, 세상이 달라져야 하고, 저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네가 다스려라, 네가 변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지 맙시다. 이웃이 내게 달리 대해주기를 기대하지 맙시다. 다 상관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져다 놓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네가 다스리라’

 

그리고 7절에서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모하라, 공부하라가 아닙니다. 행하라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려 하면 또 다른 악이 태어납니다. 오직 선으로써만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겨야 합니다. 희생으로 부조리를 이겨야 합니다. 인내로 모순을 이겨야 합니다. 

그것만이 증오를 이길 수 있는 길이요,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이 못하겠느냐”

낯을 들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 공부를 할 때도 보면 늘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개 숙이는 사람, 이거 말썽입니다. 

수업 시간에 똑바로 앉아서 선생님 얼굴만 쳐다보면 그것으로 끝난 것 아닙니까? 정신 차리고 똑바로만 쳐다보면 다 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시간에 똑바로 앉아 있지 않고 고개가 

숙여지기 시작하면 만사가 다 뒤틀립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얼굴 좀 보아라, 왜 똑바로 못 보느냐? 낯을 들어라, 그것이 네게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이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얼굴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낯을 피하려 하지 맙시다. 피하려고 해서 피할 수도 없거니와 그 분의 얼굴이 내게로 향하고 내 얼굴이 그 분께로 향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의 관계가 바로됩니다. 그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죄는 숨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밭갈이 해도 곡식을 얻을 수 없다. 땀을 흘려도 땅이 효력을 내지 못한다.’ 

죄의 결과로 하나를 막으면 다른 하나가 터집니다. 앞으로 또 어떤 문제가 터질는지 모릅니다. 회개하지 않는 한 이 사건은 멎지 않을 것입니다. 

왜 이리 불안하고, 초조한지... 숨겨놓은 아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시는 세상과 이웃을 향하여 변명하지도 말고 불평하지도 맙시다. 

내가 죽인 아벨이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오직 회개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길입니다. 

믿음을 회복하고 예배의 자세를 바로 할 때에 비로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리하여 내가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될 때,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되는 그 순간에 내 영혼이 살고 윤택해 집니다. 

여러분, 내 아벨은 어디에 있는지 깊이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각자에게 있는 나의 아벨을 제거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이 예배의 자세를 똑바로 하여 

새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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