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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 (요한복음 1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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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재산, 정치, 종교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득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식민지 시절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기독교를 접하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이 세 가지의 해악에 대하여 이렇게 설파하였습니다. 

그 세 가지 죄악은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원칙이 없는 정치’ 

마지막으로 ‘희생이 없는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하나님을 알라딘의 지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3:17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려서 적더라도 값지게 벌어들이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부를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면 저절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잘 살게.

갈라디아서 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원칙이 없는 정치, 사회

원칙이 잘 지켜지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나라가 못 사는 나라.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도 선진국으로 가려면 질서가 지켜져야.

주차. 담배꽁초, 일벌백계. 

 

마지막으로 희생이 없는 종교. 

세계사를 공부해 보면 전쟁 중에 가장 무섭고, 잔인한 전쟁이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전쟁의 명분으로 하나님의 뜻을 내세웠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 이슬람 내에서도 순니파, 시아파.

구교와 신교는 같은 기독교지만 많이들 죽였습니다. 프랑스의 개신교. 

위그노를 통하여 영국의 산업혁명이 성공을 합니다. 스위스의 시계.

희생이 아니라 무력으로 다스리려 할 때 종교는 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힘이 아닌 섬김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지배하며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으로 서로를 섬기는 곳입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고, 그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영원히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류를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려 보내기 위해서 선택하신 방법은 섬김, 헌신과 희생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헌신과 희생으로 섬김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는 섬김에서 이뤄집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희생의 종교,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이스라엘 왕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능력으로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갈망했습니다. 

이 본문 앞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등장하는데 이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많은 이적들 중에서 최고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열광적으로 맞이했던지 19절을 보면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바리새인들이 이제는 예수를 어쩔 수 없다고 포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올라온 몇 명의 헬라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 이방인. 그들은 헬라인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을 찾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빌립은 자기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에게 상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겠다 아니면 안 만나겠다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동문서답.

한 알의 밀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백성들이 보였던 반응을 보면 곧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헬라인들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자신들이 이방인으로 누릴 수 있는 영역을 청탁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흐름으로 본문을 읽는다면 한 알의 밀 교훈이 예수님을 통해 높아지기를 원하는 그들에게 주시는 명쾌한 답이었습니다. 

 

24-26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높아지려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헬라인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믿고 섬기려면 나의 삶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 성에 오신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인데 

그 십자가의 길은 한 알의 밀이 썩는 것처럼 자신의 헌신과 희생이 따르게 되는데 그 길을 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프란시스코 교황은 종교가 개종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대신에 종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개종하고 싶을 만큼 매력을 발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신앙은 강요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매력을 발하려면 섬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낮아져서 섬기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영광의 자리를 뒤로 하고 한 알의 밀이 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이고, 힘입니다. 

 

인생은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한 길입니다. 

잘 죽는 연습이 될 때 그 인생을 진정으로 복되다고 합니다. 

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잘 죽기 위함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생일을 기억하지만 실상은 어떻게 

죽느냐가 그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절정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죽어야 다시 삽니다. 

<김치의 법칙>이란 글이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치입니다. 그런데 맛있는 김치가 

우리 입 속에 들어올 때까지 적어도 5번 이상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땅에서 뽑힐 때, 칼로 배추의 배를 가를 때, 소금에 절일 때, 

양념에 버무려 질 때, 그리고 입 안에서 씹힐 때입니다. 

배추는 5번이나 죽음을 거쳐 비로소 우리 입 안에서 김치라는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 입맛대로 길들이려고 하면 갈등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아내가 남편을 자기 맘대로 조정하려고 하면 분쟁이 생깁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죽으면 삽니다. 부모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죽이고 자녀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서로 소통이 됩니다. 행복한 관계를 이룹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자기 뜻대로 주장하거나 가르치려고만 하면 관계가 악화됩니다. 자식도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좋은 관계가 됩니다. 그러나 불순종하고 자기 멋대로 하면 갈등이 생기고, 상처가 됩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남을 위해 섬기고, 자신이 죽으면 결국은 인정받고,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중심적인 사람, 남을 이용해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은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의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였는가?’로 판단됩니다.  

내가 얼마나 죽었는가를 보면 내 신앙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받고,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도 내 안에 혈기가 죽지 않고, 내 고집과 내 주장이 살아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 삼손입니다. 

블레셋 군인들이 삼손을 잡으러 들이 닥쳤을 때 사사기 16:20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 

삼손은 이미 하나님이 떠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적 둔감함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둔감함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도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도 영적 민감함으로 늘 날을 세우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고 합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알의 밀 법칙을 알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서 2:24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죽어야 사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내가 죽어야만 다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피어납니다. 

오늘 우리도 결단을 해야 합니다. 잠깐의 편안함과 유익을 위해서 살다가 

후회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지금은 좀 힘들고 어려워도 아름다운 인생의 마무리를 위해 고난 받기를 기뻐할 것인가? 

이제 우리들, 다시 한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통과 죽음이 없는 넓은 길로 자꾸만 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진정한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예외 없이 고난의 골고다 언덕을 통해서 우리한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도 예수님처럼 기도로 힘입고 

‘한 알의 밀’ 법칙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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