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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받으시더라 (누가복음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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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이 가진 문제의 대부분은 ‘YES’를 너무 빨리 하고 

‘NO’를 너무 늦게 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NO’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을 빨리 해야 되는데 오히려 이 말은 천천히 하고 ‘YES’하는 말을 더 빨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기가 막힌 부동산,  

유혹이 왔을 때에 ‘NO’라고 재빨리 거절하지 않고 있다가 그만 시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상당한 지혜가 담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언제나 시험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시험을 유혹(temptation)과 시험(test) 이 두 가지로 구분해서 사용하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다 시험으로 표시를 합니다. 

 

시험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잘못해서 혹은 실수를 해서 저지르는 일들이 있는데 이것은 심판이지 시험이 아닙니다. 

내가 돈 관리를 잘못해서 부도가 났다, 내가 일을 태만히 해서 회사에서 쫓겨 났다 이것은 심판이지 시험이 아닙니다. 

참 시험이란 이런 것입니다. 위대한 일, 착한 일,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일에 앞서서 우리에게 딱 다가오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왜요? 이제 이 시험을 통해서 목적을 바로 알고, 

지혜를 얻고, 훈련을 해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길로 들어가는 관문이 있습니다. 

그 관문을 넘어가야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 관문을 통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그 관문을 통과하지 아니한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시험의 중요한 특징은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시험은 유혹(Temptation)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본문에서 두 가지 구절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데 

1절의 성령에 이끌리어와 13절의 얼마동안. 

우리들도 신앙이 업그레이드 되려고 하면 성령에 이끌리어 test를 반드시 받는 것과 시험이 끝나도 아주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 주님께서 홀로 기도하시며 밤을 지새우셨냐 하면 보통 승리의 날 직후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승리하기 위해 기도하고 또한 승리한 후에도 기도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영적 전쟁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매일매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48장

 

예수님이 당하신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경제에 있다, 고로 넉넉하게 잘 살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경제가 모든 문제의 열쇠다, master key다 하는 시험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부자 관원의 비유를 보면 이 부자는 선한 부자입니다. 

세상을 보면 남에게 못할 짓을 해서 돈을 모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부자는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이 부자는 영적인 갈급함을 풀려고 다른 랍비들이 아닌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 영적인 갈급이 풀리지 않았거든요...

목이 말라본 적이 있으십니까? 목이 마를 때는 콜라나 커피 같은 것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생수로만 풀리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목마름은 돈으로도, 명예로도, 지위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8:22과 같이 답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이 비유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청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놓고는 이 청년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이 청년에게는 하나님이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우리들에게는 십일조를 요구하십니다.

재산의 1/10이 아니라 번 것의 십분의 일. 하셔야 합니다.

 

공산주의의 두 가지 특징은 가난하다는 것, 그런데 그 가난의 원인을 부자 때문이라고 돌리는 것과 매사에 감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중으로 불행합니다. 가난해서 불행하고, 감사할 줄 몰라서 불행합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는 감격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 찬양의 첫 번째 가사가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님 감사 아닙니까?

 

두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께 천하 만국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보이면서 ‘내게 한 번 절만하라, 그러면 이것을 다 주리라’한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데서 한 번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에게도 일본 순사들이 한 방법. 절 딱 한번만, 

한경직 목사님이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간 상처. 신사참배.  

지금 마귀는 예수님에게 이것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보는데서가 중요합니다. 코람 데오, 하나님은 아십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하고 말한 것입니다. 

심지어 마귀는 10, 11절에서 시편의 말씀까지 인용합니다. 시편 91:11, 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뛰어내리라’ 대체 왜 뛰어내리라고 하는 겁니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당장에 화끈하게 이루어지는 일을 의미합니다. 당장, 우리는 이렇게 바랍니다. 시간적으로 급하게, 쉽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무서운 시험인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 두 제자라는 사람들이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가르쳐서 전도하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참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과정이 지루하고 답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썩어지는 밀알이 돼가지고야 뭐가 되겠습니까? 

좀 화끈하게 이루려면 깜짝쇼를 해야지요. 그래야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고 ‘와’하게 되어야 뭐가 되는게 아니냐, 그 말입니다. 

넘어가기 쉬운 유혹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성전 꼭대기에서 “나를 보시오, 여러분!”하고 훌쩍 뛰어내린다면, 그러고도 무사하다면 사람들이 “와! 참 굉장하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 위대한 지도자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냐, 하는 유혹입니다. 뭔가 특별하게 기적의 사람으로, 초인간으로 나타나라, 그래야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에건 꼭 수고와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과 수고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심지어 마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수고할 것 없다. 그냥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내려오라. 왜 매달려 있느냐. 훌쩍 뛰어내리고 ‘놀랐지’하면 간단할 것 아니냐, 그러면 메시야의 나라가 올 것인데 왜 매달려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은 부활의 아침입니다.  

 

기복신앙, 무속신앙이라는 것은 복은 구하지만 도덕성이 없습니다. 

가령 우리 아이가 이 대학에 꼭 가야 하겠습니다 하면 ‘그러면 공부를 잘 하여야겠구만, 열심히 해’하고 말하는 무당은 없습니다. 

‘굿을 해야 돼. 아이한테 살이 끼었으니 살풀이를 해야 돼’ 이런 식으로 나갑니다. 도덕성이 없고, 윤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무속의 특징입니다. 

수천 년 이어 내린 우리네 종교 문화이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이러한 무속신앙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무 수고 없이 무엇을 얻으려고 하고, 힘들이지 않고 누리려고 하고, 고생 없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즐기려고 하는 유혹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가 아니라 마귀로 만들려고 하는 불신앙입니다. 반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과학적인 신앙을 가질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무릇 성실을 심고 번영을 거두는 것입니다. 사랑을 심고 평화를 거두는 것입니다. 거짓을 심고 진리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판단력도 주셨습니다. 양심도 주셨습니다. 도덕성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주신 지식과, 지혜와 이미 주신 능력은 다 부인하고 내 수고는 없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만 임하기를 바라는, 바로 이런 마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십니다. 12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심은대로 거두리라, 이것이 진리입니다. 

수고한대로 그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과학적 신앙입니다. 

쉽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 때문에 우리가 많은 어려움을 치러야 합니다. 뛰어내리라, 그리고 기적을 통하여 쉽게 역사하라고 마귀는 시험하지만,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험난한 길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장 영광을 취하라고 마귀는 시험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비록 당장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먼 훗날에 제자들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이루라고 마귀는 시험합니다만, 주님께서는 아니다, 나는 나의 희생, 내가 지는 십자가를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겠다 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여기에 참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쁘게 이루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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