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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반 (마가복음 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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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교회가 강남으로 이사온 게 2008년입니다. 2004년에 상암동에서 개척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중 교회 자리가 도로로 편입되는 바람에 교회를 옮겨야 됐는데 생각지도 않게 교인들이 옮기자고 해서 강남으로 옮기게.

그전에는 강남에 대해서 좋지 않은 선입관도 있었고 사실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니까 2008년 이전에는 가끔 강남을 오면 불편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2006, 7년쯤 일이라고 생각되어 지는데 저희 집사람이 저녁약속이 압구정 현대백화점에서 있는데 어떻게 가는 것이 좋겠냐고 물어봐서 지하철.

사람들이 붐비는 시간이지만 제가 타기만 하면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니까 염려하지 말고 타라고 했더니 그날 저희 집 사람이 다리 아파서.

저는 타기만 하면 사람들이 잘 일어났었는데 시대가 변한건지 내가 젊어진건지 모르겠지만 요즈음은 잘 일어나지를 않고, 오히려 잠깐 머뭇거리면 싹 앉아 버려요.

 

썰렁 퀴즈, 나이드신 분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네. 

효자동입니다. 청와대 옆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 마을 이름이 왜 효자동이 되었는지 그 유래가 이렇다고 합니다. 

효자동에 살던 어느 할아버지가 손주를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항상 옆에 꼭 데리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손주를 품에 꼭 껴안고 낮잠을 잤는데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몸을 돌리다가 그 귀여운 손주를 깔고 누워서 손주가 죽었습니다. 

며느리가 아들에게 죽은 아이를 안고 뛰어가서 알렸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아들이 사정없이 죽은 아이의 볼기짝을 찰싹 때렸습니다. 

“이 나쁜 놈, 네가 이렇게 죽으면 우리 늙은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 이 불효한 놈아!” 그러면서 죽은 아이의 볼기짝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그 아이가 하품을 하면서 깨어나더랍니다.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이 효자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5월 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번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어버이날의 유래를 잠시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00 여 년 전 미국 버지니아주 웹스터라는 마을에 ‘안나 자이비스’라는 소녀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그 산소 주위에 어머니가 평소 좋아하던 카네이션 꽃을 심었습니다. 안나 자이비스는 그 후 어머니를 잘 모시자는 운동을 벌여 1904년에 시애틀에서 어머니날 행사가 처음 개최되는데, 이 날 어머님이 살아계신 분은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분은 자기 가슴에 흰 카네이션을 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에서는 1913년 이래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고, 점차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에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으며, “그럼 아버지는 뭐냐”는 여론에 따라 73년부터는 “어버이 날”로 바꾸었습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구별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람은 아버지의 이미지에따라 그의 신관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일리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관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식도 달라집니다. 

비근한 예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들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주 무서운 하나님으로 표현됩니다. 그가 이렇듯 하나님의 진노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랄 때에 그의 아버지로가 엄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father image)’란 그 사람의 인생관에 이렇듯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부모를 네 종류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 나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입니다.

 

둘째, 영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교역자를 신부라고 합니다. 영적인 아버지라는 뜻이요, 영어로는 문자 그대로 아버지, “Father”라고 부릅니다. 

 

셋째, 나에게 지식을 공급해 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스승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승을 사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음 주는 스승의 주일로.

 

넷째, 왕을 아버지라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국가의 원수를 존경할 수 없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입니다. 

참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또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나타나는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한마디로 허용하는 아버지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아버지일수도 있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고약한 아들을 둔 것도 한심하거니와 그런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는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에는 낭비성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사랑은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주리니”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탕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인지 번연히 알면서 기다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는 이 한 가지 기쁨에 더불어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 아버지의 이 벅찬 기쁨을 함께 수용하고 누리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모든 부끄러움과 죄송스런 마음과 죄책감을 다 묻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 기쁨에 참여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이렇게 염치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인간의 원죄는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죄가 핑계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다 그럴듯한 핑계를 댄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자녀들의 그 핑계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인 마가복음 7:11에 보면 ‘고르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람어로 정확하게 읽으면 ‘코르반’이고 본디 하나님께 바친 성별된 헌물, 제물을 뜻하는 말인데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좋은 뜻으로 시작된 고르반이 점차 변질되고 악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자식들 중에 부모를 공양하기 싫을 때, 부모 때문에 자기 돈 쓰지 않으려고 이 고르반을 악용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그런 자식들이 다 있나?” 그런 자녀들 많습니다. 부모가 재산 있을 때는 한 푼이라도 더 물려받으려고 부모에게 온갖 아양을 떨지만, 거꾸로 이번에는 내가 부모 위해 돈을 써야 할 상황이 되면 너무 싫은 겁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또 내 자식 위해서는 좋은 음식, 좋은 옷, 최신형 핸드폰 사주고 과외비다 뭐다 엄청난 돈을 써도 안 아깝지만, 부모 위해 쓰는 돈은 너무 아까운 겁니다. 이런 나쁜 자식들(정말 ‘나쁜 자식들’이죠)이 지금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식들이 생각해 낸 기막힌 핑계가 바로 ‘고르반’이었던 것입니다. 부모 위해 내 돈 쓰는 게 싫을 때 이것은 고르반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맹세한 것이다.” 하고 선언하면 다른 어떤 용도로도 쓸 수 없으니 부모를 위해서도 안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 좋은 척.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런 고르반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핑계, 우리의 고르반입니다. 세상에는 ‘고르반’이 참 많지 않습니까? 

부모 공경뿐만 아닙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안 하는 데도 우리는 수많은 고르반, 수많은 핑계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 잘 못 나오는 분들에게 “왜 요즘 교회 잘 못 나오세요?”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바빠서요.”가 등등...

어떤 분은 왜 교회 잘 안 나오시냐고 물으니까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요.” 하고 대답합니다. 참 고르반이 다양하지요?

그렇다면 그 고르반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 복 받는 인생이 되길 원한다면 내가 생각해낸 그 기막힌 고르반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고르반을 극복하고 벗어나도록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철저한 회개와 결단 없이는 우리는 언제든지 또 다른 그럴듯한 고르반을 생각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 책 제목, <마음이 없으면 핑계만 보이고 마음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 멋진 말 아닙니까? ‘고르반’ 핑계 대신 결단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반드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십계명 중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6-10계명은 ‘하지 말라’는 명령인데 5계명만 ‘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이 계명은 적극적으로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효도는 살아 계실 때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 죽은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조상을 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조상은 위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제사가 죽은 조상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살아 생전에 불효하다가 부모 돌아가신 다음 성대하게 제사상 차려놓고 절한다고 무슨 유익이 있고 소용이 되겠습니까?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 후회하고 울지 말고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기 바랍니다. 아홉 가지 계명은 내가 범하고 잘못 감당했다고 할지라도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 만큼은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효도 방법의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님 생전에 예수 믿게 한 자녀는 최상의 효도를 한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분들이 복음을 알고 있습니까? 

오늘이라도 그분의 생애에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고 하면, 내 부모님들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금식하며 기도하셔야 합니다.  

남들은 오지까지 가서 선교하는데 나는 내 가정, 내 가족이라도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부모님을 섬긴 효자 성도에겐 특별한 상급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 공경만큼은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보너스가 두둑한 계명이란 얘기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첫째 계명이고,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교회 교우 여러분!

이 아름다운 계절, 5월 가정의 달에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께 효도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아 온전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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