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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4:16-20)

목사님 0 53

 

 매년 겨울 매서운 추위가 있었지만 새싹이 돋아나고 꽃피는 봄은 꼭, 반드시, 마침내 찾아옵니다. 

죽음이 아무리 강하게 보여도 새 생명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다 죽은 것 같아 보였지만 생명의 씨는 그 씨앗 안에서 웅크려 

때를 기다렸다가 봄이 되니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이 부활의 소식을 꽃봉오리에 새겨 놓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냉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지금 사는 아파트 길 건너편 금화초등학교 근처, 제가 좋아하는 영천 시장 옆. 

요즈음 아파트의 특징, 조경을 잘해 놓아서 갖가지 꽃들을 볼 수 있다. 

제가 사는 아파트는 아이들이 많아서 어린이 놀이터가 활성화. 

 

지난 주일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이었고,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진 때는 새벽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그 다음날 새벽, 몇 사람의 여인들, 마리아들이 찾아간 곳은 예수님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새벽은 특별했습니다. 

여인들은 평생 동안 그 날 새벽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새벽은 온 세상을 향해 위대한 ‘시작’을 알렸습니다. 

모든 것은 새벽에 시작됩니다. 하루도 새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지난 주간은 고난주간으로서 특별새벽예배가 있었습니다.

끝이 좋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고난주간 새벽예배 마지막 날에 많이들 참석.

인천에서 김윤석 성도님(청일점) 찾아 주시고, 김이준 시험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고자, 기를 받고자, 성령을 받고자 참석.

 

새벽은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새벽이 되면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죄인도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습니다.  

기독교의 특징,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하는 부활의 새벽,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새벽의 색깔은 화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부활의 새벽 이전까지는 온통 검은 것뿐이었습니다. 

본래 죽음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검정색입니다. 

그러나 새벽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고, 태양이 떠오르면 온 세상이 각각의 색깔을 드러냅니다. 이 찬란한 화사함, 이게 바로 부활의 색깔이고, 생명의 색깔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중충한 절망의 그늘에서 떨치고 나와서 생명의 빛 아래서 화사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밝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새벽이 되면 사람들은 창문을 열어 방안의 탁한 공기를 몰아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어오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절을 맞은 우리도 영혼의 창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맑은 생명의 공기를 들이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그리고 부활절의 대표적인 음식으로서 계란이 있습니다. 

계란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계속되고 있으며, 

마치 겨울 뒤에 숨어있는 봄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부활절 계란은 주님께서 살아나셔서 부활의 새 생명을 얻으셨던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 후에 김미경 집사님께서 준비하시고 정성껏 포장한 계란을 

가져 가시기 바랍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생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살을 하고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장 독극물을 먹고 거꾸러져야만 자살인 것은 아닙니다. 

생명에 해로운 줄 알면서 몸에 나쁜 것을 먹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살입니다. 근심 걱정도 나쁘고 그리고 증오도 결정적으로 몸에 나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 걱정하고 절망하고 잠을 못 이루면서 미워하고 시기 질투합니다. 이것이 자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에 신비가 있습니다. 출생의 신비와 죽음의 신비. 

아무리 생각해도 이 출생이라는 생명의 신비는 너무도 놀라운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신비가 죽음이라고 하는 신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절대적이요 그리고 보편적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고맙게도 죽음은 공평합니다. 누구나 다 한 번은 맞이할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죽음을 대비해야 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늙는다, 거기서부터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미련한 자들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들은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러시아 모스코바 붉은 광장에 가서 레닌의 무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썩지 않게 방부제로 처리하고 항상 무덤 안을 섭씨 16도로 유지하여 지금도 죽을 때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 위해서, 

혹은 우리처럼 구경하기 위해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누군가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내면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하루 아침에 문을 닫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낼 수는 있지만 시체는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부활절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 가족이 복음을 들고 제물포 항에 도착해서 한국 땅을 밟음으로서 이 땅에 개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한국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장로교 선교사님이십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감리교 선교사님이십니다. 그 당시 교회법은 먼저 도착한 교단의 선교사가 그 땅에 우선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두 분이 손잡고 같이 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사이좋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펜젤러는 도착 즉시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었는데 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우린 부활절 아침에 이 땅에 도착 했습니다. 이 날 사망의 철장을 깨뜨린 주님께서 이 백성들을 묶고 있던 결박을 푸시고 그들을 주의 자녀로, 빛과 자유로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이것은 불과 134년 전의 일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부활절 아침에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성경에 예수님의 부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도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보고도 의심하고, 만져보고도 의심하고, 같이 식사하면서도 의심하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마주보면서도 오히려 의심하더라 합니다. 

똑똑한 사람의 생각으로, 이성의 판단으로야 이것이 어떻게 믿어집니까? 

왜? 내 경험에 없으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때때로 부활을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변증법적으로, 철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듭니다마는 그 노력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만약 부활 사건을 꼭 증명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계시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세히 보여주고 설명해 주셨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해도 어차피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습니다. 

 

사도행전을 쭉 읽어 가면 부활 신앙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역사하느냐를 보여줍니다. 그 대표로 전반부에는 베드로요 후반부에는 바울을 기록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베드로의 용기를 봅니다. 

베드로는 과거에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그는 담대하게 오천 명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매 맞을 때에 더욱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 많은 핍박과 곤욕을 치를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너의 말을 들어야 옳으냐,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옳으냐? 네가 판단하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4:19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대단한 용기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좀 우쭐하기 좋아하고, 칭찬받기 좋아하고, 앞서기 좋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0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 명예, 자기 교만이 싹 사라지고 주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유와 겸손이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참으로 겸손할 수 있고, 참으로 진실할 수 있고, 참으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놓고 사는 처럼 담대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오늘 체험하는 것이요 그 생명력에 의해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나를 지켜보시고 그 안에 내가 삽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제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이 정말 당신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주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며 부활주링 새벽의 은혜를 가슴에 안고 힘차게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절 성찬식

고린도전서 11장 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찬송 311장 “내 너를 위하여”

 

떡과 잔을 나눔 144장  

(떡을 떼며) 이 떡을 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멘.

(잔을 들며) 이 잔을 마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멘.

 

결단의 찬송  갈보리 십자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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