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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태복음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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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33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사생애, 공생애

30년 동안은 요셉의 아들로 목수의 일을 도우며 생활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공생애라고 부르는 마지막 3년을 사시게 되는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사역의 시작을 알리시고 그 후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시고,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 공생애 3년 중 가장 중요한 기간은 마지막 한 주간,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까지의 일주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주일인 부활주일에 끝이 납니다. 

 주일에 입성하시고, 월요일에 성전정화를 하시고, 화요일에는 감람산에서 여   러 가지 말씀을 하셨지만 수요일의 행적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목요일에는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잡히셨으며, 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토요일, 안식일에 무덤 속에 계시다가,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은 성 금요일이라 하여 금식을 함으로써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가능하신 분들은 모두 금식함으로써 그 고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금식을 적절히 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영혼이 경건해지는 유익이 있습니다.

금식할 때 물만 마셔야 합니다. 다른 것을 마시면 더 힘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순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어지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인본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다시 생각해 보는 것,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관한 기사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다니시곤 하였으나 이 날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유월절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으로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을 하셨습니다.

승리의 입성이라고는 하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divine appointment.

예수님이 죽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교회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시면 안 되고 죽으려고 오셔야 합니다. 죽어야 삽니다. 

죽어야 별다른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배웠던 한신 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이라는 분은 ‘별세신학’으로 유명합니다. 그 분이 큰 수술을 받기 위해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로 들어갔는데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프더랍니다. 

그러자 의사들이 ‘어 안 죽었네’

죽어야지 살리는 수술을 하는구나 하시고는 ‘별세신학’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 별세신학의 중심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어로 보면 동사가 먼저입니다.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나는 이미 죽었다. 여러분, 앞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벌써 죽었습니다. 

오늘 죽는 것이 아니라 어제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죽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오실 때 수천 명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10:40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돈을 영접하면 돈의 종이 됩니다. 권력, 학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됨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뜨겁게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기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시자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아들였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었나?’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을 요한복음 17-18절에서 해 주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이 표적’이라는 말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아들인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는 당시 예루살렘을 비롯한 온 동네에 가장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슈퍼스타였습니다. 그래서 미러클 메이커(기적을 만드시는 분)이신 슈퍼스타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여러분, 혹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나사로를 살리신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분명 사실이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기적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것보다 내 병을 치료해 주시고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런 슈퍼스타이신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믿음을 잃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겼던 욥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열 명의 자식들과 그 많던 재산을 한 순간에 다 잃었습니다. 만약 욥이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만을 믿었다면 자신의 재산과 가족들을 지켜주지 못한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의 대상이요, 저주의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평생 안고 살아온 질병 때문에 힘들어하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습니다. 바울이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만을 믿었다면,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만을 믿었다면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나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미러클 메이커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호산나를 외친다면, 우리도 얼마 지나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치는 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기적을 행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슈퍼스타가 되시기 위함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묵묵히 십자가로 향하여 가셨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을 대할 때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기꺼이 내어놓은 나귀의 주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지금까지 별 관심이 없었던 나귀의 주인에 대하여 같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잠시 빌리자고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나귀 새끼의 주인은 어디에 쓰실 것인지, 어떻게 쓰실 것인지, 왜 하필이면 자기의 나귀 새끼여야 하는지 그는 전혀 묻지를 않았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계획도 접었습니다. 자신의 욕심도 접었습니다. 그리고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가 쓰시겠다!’는 이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부딪쳐야 합니다. 

우리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면 훌륭한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드리는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드리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쳐 버리든지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16-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다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잠시 빌려 쓰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언제나 고백되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분들은 주님이 쓰시겠다 할 때 어려워하지 않고 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사노라면 우리들의 인생 앞에 여러 가지 시련과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 새벽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주님이 가신 그 좁은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걸어가셨던 좁은 길, 어려운 길, 그런데 그 고난의 길 끝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됩니다.

나귀 타고 갔던 예루살렘 길은 골고다 언덕으로 이어지고 그 고통의 끝에서  바로 다음 주일 아침에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분과 같이 부활의 아침을 기쁘게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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