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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양보 (창세기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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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짱짱~~!!^*^

 지난 주 합창단이 오니까 교회가 꽉 찬 느낌, 16명

제가 요즈음 다른 교회에 가보면 제가 얼마나 게으른지 알게 됨.

Impact가 없으니까 교인 수 감소, 우리 새하늘교회 위기.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교회가 사라질 지도.

고3 김이준, 선우 진, 선우 정, 자랑스러우니까, 시온, 로희.

김영수 성도님의 신유사역 세미나가 4월 3일에 시작. 

많이들 참석하고 같이 준비하실 분들. 

3월 31일 교회 개척 15주년. 꽉 좀 채워봅시다.

성도님이 100명 되면 이스라엘 성지순례 같이 가자고.

 

‘줄을 잘 서야 한다’고들 합니다. 특히 군대.

줄을 잘못 서서 낭패를 당하는 일들을 주변에서 흔하게 봅니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운전을 할 때도 차선을 잘못 들어서면 고생을 하게 됩니다. 어느 줄에 서느냐에 따라 시간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택은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바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 선택하는 것 외의 나머지는 모두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택하는 결단을 하는 동시에 버리는 결단, 포기하는 결단을 아울러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코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좋은 일이 제일 좋은 것을 가로 막는다’고 했습니다. 

죄가 가로 막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가로 막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좋은 일이, 차선책이 최선을 가로 막는다는 말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야 하는데 사업상 중요한 약속이 생깁니다. 그러면 고민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대신 사람을 만나는 일을 택하게 됩니다. 

차선을 선택한 사람을 결국 최선의 길을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최선을 선택하는 훈련.

그런데 굳게 결심하고 갈 때에 방해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결단이 있는 자는 우왕좌왕하지 않고 직선거리를 갑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합니다. 

부름의 상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길을 갈까? 말까? 고민하고 계신 분들 계십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선택하고 그 길을 힘차게 달려갈 것입니다. 

결정 장애가 있으신 분들, 식당에서도 웨이터가 자리만 아니라 메뉴까지.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은 목표에 결코 다다르지 못할 것입니다.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복잡하던 머리가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가고. 안들린다고요?

들릴 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들릴 때까지 기다리셔야.

들리지 않는데 시작했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들 참으로 많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그 자손을, 그 민족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켜 선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창세기 12:1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가리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일단 떠나라 순종을 먼저 요구하십니다. 

떠나면 땅을 보여주시겠다 하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 7절에서 자손에 대한 복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습니다. 그 즉시 주셔도 늦다 할 판에 10년을 기다려도 주시지 않자,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기는 믿는데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갈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은 언약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15년이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사라가 이미 경수가 끊어져 인간으로서 도저히 잉태할 수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은 이삭이라고 하는 귀한 아들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된다고 한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때 태어난 이삭이 바로 언약의 자손입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성실하게 변함없이 일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하고도 휘청휘청합니다. 

많은 실수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하십니다. 

더 나아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이 평생을 유랑 생활하다 죽게 되는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심지어 사라가 죽었을 때 막벨라 굴을 가나안 주민에게 돈 주고 사는 것도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장막 칠 만큼의 땅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살아가던 그였습니다. 그러던 중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게 들어 먹고 살수가 없어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갑니다. 애굽에서 죽을 뻔도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조카 롯과 함께 나옵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에게도 가족과 소유가 있었고 롯에게도 가족과 소유가 있었습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유가 많아서 같이 동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상황이 이리되자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 말합니다. 

그래서 분가하기로 하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은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을 선택하고 화평하기 위하여 양보를 합니다. 

8절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절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화평하려면 양보부터 하여야 합니다. 양보없이 화평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부는 못할지언정 반이라도 양보해야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반도 양보할 마음이 없으면 애초부터 화목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기득권을 롯에게 양보합니다. 

그리고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합니다. 

참으로 엄청난 양보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양보하고 희생해서 손해를 좀 보면 그 손해는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으로 반드시 보상해 줍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양보는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신앙적 양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양보하려면 우리도 구체적 사건 하나하나에 너무 연연하지 말 것입니다. 이렇게 걸만한 일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사업, 지위, 명예..... 다 그렇습니다. 

“너 이 대학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이 대학에 못들어 갈 바에야 죽어라”하는 부모님들이 있다고 합니다. 못 들어간다고 죽어야 합니까? 한 번으로 안되면 재수요, 재수로도 안되면 삼수요, 삼수로도 안되면 다른 대학 가면 되지요, 대학 정 가기 싫으면 직업을 가져도 되지요. 

이 문이 닫히면 저 문으로 들어가면 될 것 아닙니까?

무엇인가 하나에 목숨을 걸어놓고는 못들어가면 가문의 망신이라느니 어쩌느니 야단입니다마는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뭐 그리 대단한 가문입니까?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릇된 집념이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미치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유형입니다. 한 번 파고 들기 시작하면 스스로 못 견뎌합니다. 잠조차 자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리 연연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왜 양보했는지 아십니까? 덕이 있고 인격이 높아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는 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반면 롯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봅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당장 ‘오른쪽이 좋은지 왼쪽이 좋은지’ 열심히 계산하기 시작하면서 

‘요단 들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땅은 그의 눈에 당시 풍요의 땅 그 자체로 유명했던 애굽 땅처럼, 그리고 여호와의 동산 즉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기름지게 보였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롯과 같이 순전히 세속적인 축복관을 추종하고 세속적인 성공 비결을 따라서 선택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선택 과정에 그 어떤 영적인 고려, 본인과 가족의 신앙생활에 미칠 영향에 대한 고려는 조금도 없이 그저 어찌하든지 돈 잘 벌 수 있을 것 같은 길만 쫓아다니고 그 다음에는 그 돈 가지고 마음껏 향락할 수 있는 생활만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롯은 먼저 그 곳을 갖겠다고 합니다. 형식적으로라도 한 번쯤은 ‘삼촌이 먼저 선택하십시오’하고 양보할만도 하지만 저가 먼저 선택을 합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호와의 동산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속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좇는 그것이 여러분을 망하게 합니다. 돈, 권력.

롯은 장차 이 아름다고 풍요한 땅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마는, 결국 이 때문에 망하고 맙니다. 

더욱이 12절을 보면 롯이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불행하게 되는 줄 알면서도 정신없이 그쪽으로 치닫는 것이 불행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잘못된 일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끊지를 못하고 그 길로만 달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리고 충고하면 내 마음 나도 몰라, 내비둬.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혹, 선택을 잘못한 것 때문에 지금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궤도 수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선택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길을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바른 선택을 해 놓고 그 아름다운 선택을 지키기 위해서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풍랑이는 이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의지하여 마침내 승리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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