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그리스도인의 나라 사랑 (로마서 9:1-3)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오늘은 3·1절 기념 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자주 독립을   외치며 우리 민족이 모두 궐기했던 날입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국제적인 관심은 일본이 남하해 오는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입장이었기에 한일합방에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었음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은 이러한 우리 민족이  

민족적 자주생존권과 독립을 선언한 운동입니다.

3.1 독립선언서는 조선 민족의 주권을 세계 만방에 선포한 ‘독립선언’을 넘어 민족의 미래를 밝힌 ‘세계시민인권선언’이요, ‘평화선언’입니다. 

독립선언서의 정신은 고스란히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담겨 있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민족(民族)’입니다. 

독립선언의 주체는 민족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 인종이나 국가 단위인 국민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민족은 단순히 혈통 상의 단일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민족(韓民族)은 반만년 동안 비교적 순수한 혈통을 유지해 왔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이미 북방계와 남방계가 섞여 있고, 역사적 부침에 따라 한족, 몽골족, 여진족, 일본족이 일부 섞여 들어왔다. 

이는 성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당시 “수많은 잡족(mixed people or race)”이 함께 했다고 보도한 것과 동일합니다. 출애굽기 12: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1독립선언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혁명선언입니다.  

거사가 일어난 지 30일 만에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며, 임시헌장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시작하였다. 우리 헌법 또한 이를 계승하여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정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에서 많은 부분 언급되고 있는 것은 ‘동양평화’이다. 

“2천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4억 중국인을 자극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망하게 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합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에 의해 약소민족을 억누름으로써 이루어지는 평화였다면,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na)는 십자가로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함으로 건설되는 평화였다. 

산상수훈,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대며,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는, ‘이에는 이’ 식의 폭력의 논리로는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간디의 비폭력 운동도 산상수훈에서 비롯. 

나일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사이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우리 한반도처럼 바람잘 날이 없었다. 그들의 인사가 “샬롬(평화)”이 될 정도였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평화의 낙원에 대한 이상을 제시해 주신다. 이사야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정확히 핵과 군사력으로 첨예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오늘의 한반도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생태계까지 아우르는 평화의 비전을 말씀하신다. 

이사야 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평화는 성서적 가치이며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3·1독립선언서는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민족 이기적인 관점에서 찾지 않고, 동양평화라는 거시적, 이타적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은 신앙의 발로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애국자가 되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길을 살아갔습니다. 

3.1 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지금과 무엇이 달라서 큰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고 사회적 존경을 받았는가? 당시의 신앙은 사사화되지 않고 공공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 대한 의무감과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우리 민족 공동의 선을 위해서는 타 교파는 물론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연합.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신앙적인 행위가 아닌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 시대의 역사적 과제 해결에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님을 확신한 기독교인들이 신앙적 결단으로 3.1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로 이승훈 장로와 신석구 목사가 있습니다. 

이승훈, 신민회 발기에 참여했고, 오산학교를 세웠다. 

105인사건에 연루,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1919년 2월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며 3.1 운동 거사 준비를 하던 이승훈 장로가 2월 중순경 평양에서 몇몇 목사들을 모아놓고 거사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자 그 가운데 몇몇은 일제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에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러자 이승훈 장로가 책상을 치면서 소리쳤습니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 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겠어?”

그는 일제의 재판정에서도 당당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셨는데 우리는 이 존귀한 자유를 남에게 빼앗겼다. 자유를 빼앗긴지 10년 동안 심한 고난과 굴욕이 우리를 죽음의 골짜기로 이끌었다.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원수로 갚되 이렇게 심할 수가 있느냐? 우리의 이번 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의 독립은 한국의 영광일 뿐 아니라 튼튼한 이웃을 옆에 갖는 일본 자신의 행복도 되는 것이다.”

 

신석구 목사 

1918년 11월부터 서울 수표교 교회를 담임하다가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는데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회고. 

“오화영 목사가 1919년 2월 12일 경에 만나 나보고 말하기를 모처에서 독립운동을 하여고 천도교 측과 연합하고자 아니 거기 참여하겠느냐 하는데 내 생각에 두 가지 어려운 것은 첫째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둘째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여 즉시 대답하지 않고 좀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 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곧 결정.

그러나 독립이 곧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마음 속에 민족 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는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 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남겨 주리니 이만 죽어도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검사의 ‘장래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 나는 한일합방에도 반대했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할 생각이다.”

라고 대답하여 5개월 간의 독방생활을 포함하여 2년 반의 옥고를 치루었다.

 

오늘 우리가 사도바울의 글을 한번 읽어봅시다. 

1절과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사도바울은 그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택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로 유대인보다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더 매진했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그치지 않는 근심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근심과 고통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근심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바울이 새로운 마을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거기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면 그들이 마음을 열고 그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데, 유대인들은 한결 같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는 고통이요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내 동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내가 어떤 대가라도 다 치룰 수 있다고 그렇게 고백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

내가 저주받아서 지옥 불에 던져지더라도, 내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을 위해서 너무 비통해하고 너무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울의 간절한 고백은 이제 10장 1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바울은 소원은 오직 한 가지, 내 동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기도를 드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시내산 위에 올라가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을 추며 먹고 마시고 음란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려고 할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

출애굽기 32:32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모세의 마음이었고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인들은 나만 잘되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과 민족과 나라를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3.1.운동이 없었다면, 2차대전이 끝났다 하더라도, 우리는 일본에 편입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아셨습니까? 

우리는 3.1.운동이 있었기에, 우리가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치지 않는 고통을 말하던 사도바울의 신앙으로 오늘도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 사랑이 신앙으로 승화되어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새생명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