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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다 (사도행전 10: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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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들은 지금도 선민사상에 잡혀서 살아갑니다. 

선민사상, 선택받았다는 사상,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게 하셔서 지금 우리들에게도 전수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암기력과 지독함, 구전으로 말씀을 전해지게.

선민사상이 얼마나 투철하냐하면 그 당시 로마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지만 로마 사람들조차 이방인으로 여겨 종교적으로는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인들에게 베드로를 통하여 성령이 강림하는 첫 번째 사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구조적으로 세 요소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육과 혼과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개가 합쳐져서 하나의 인격으로 종합된 구조를 가지고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쪽이 주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가 주도하는 삶을 삽니다. 자나 깨나 육체적 욕망에 끌려 삽니다. 육욕주도적인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철저하게 이성주도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먹고 입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일로써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영적 주도적인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행복해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느끼고 힘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은 하나님께로서부터 오는 말씀을 먹고 삽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와의 대결에서 4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명기 8:3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살아가는데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먹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먹지 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됩니다. 저는 어지럽고 집중이 안돼.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면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캄보디아에 가서 영양실조로 눈이 안 보이는 아이를 본 적이 있는데 며칠 영양제를 투여했더니 눈을 뜨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영양불균형 또한 문제입니다. 골고루 잘 먹어야 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죽어도 시체가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방부제 섞인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나요. 정말 그렇습니다. 

제대로 먹는다는 문제는 육적인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허하고, 영적으로 허한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으로도 허한 사람이 되면 그릇된 사상에 빠지고,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에 왜 빠집니까?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바르지 못한 영이 전달될 때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허해서 그렇습니다.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또 음식은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고 감사함으로 먹는 데에 건강의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맛있게들 먹고 계십니까? 

사탄의 무기는 진화하지만 우리들의 무기는 오직 성경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이 아니고는 결코 새 생명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옥토라 하더라도 씨가 뿌려지지 않고 자라는 법은 없습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는 거듭납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을 먹고 성장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슴으로 담은 말씀은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저는 여러분들의 스승이기도 하여야 하지만 더 나아가 영적 아비이어야 합니다. 

 

학자들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두고 ‘제2의 오순절’이라 별명을 붙여 부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오순절은 사도행전 2장에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사건이 있은 그 오순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사람들에게 나타났던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은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전적으로 이방인에게 나타난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보고 ‘이방 사람들도 성령을 받는다’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성령받는데 왜 놀랍니까? 

유대인들에게만 성령이 임하는 줄 알았는데 유대인이 아닌 로마 사람에게 성령이 임해서 놀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입니다. 정복군의 백부장이지만 분명 이방인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서 유대땅에 와서 식민지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의 장교로서 그는 당연히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고 로마에서 섬기던 우상이 있고,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 로마가 세상에서 최고다 라고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긍지에 살아가는 이 로마 장교가 종교에 관한 한은 피정복지인 예루살렘 종교가 옳다고 믿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른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네 속국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천사를 만나게 해 주십니다. 

천사의 음성을 듣고 천사의 지시대로 그는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을 청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감격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를 비교해 보시지요.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입니다. 예수님을 3년 따라 다녔다고는 하지만 아마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볼품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 있는 고넬료가 이 볼품없는 촌사람을 모셔옵니다. 

모셔 와서는 예를 다합니다. 깍듯이 정중합니다. 그래서 온 집으로 더불어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들어설 때에 모두가 엎드려서 경배를 합니다.  

순간, 본디 남 앞서기를 좋아하고 우쭐대기 잘하는 베드라이지만 황송해 합니다. 고넬료의 경배하는 자세가 너무도 경건해서 26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보십시오. 이 고넬료가 지금 베드로를 보고 있는 것입니까? 눈으로는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를 보지만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말합니다. 33절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예배드리는 시간, 설교듣는 시간을 바로 그와 같은 시간이어야 합니다. 

‘저 목사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나는 여기 하나님 앞에 있다.’ 그리고 들으면서 마음으로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취한 자세,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43절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의 중심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케리그마적 복음을 전하는 순간, 오늘 성경에 보니 ‘이 말을 할 때에’

‘한 다음’이 아닙니다. 하는 중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아도 ‘에티’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는 중에 입니다.

44절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실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바로 이 시간에 임했습니다.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임하고, 그 순간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편견도 아집도 문화적 장벽도, 심지어는 언어의 장벽까지도 무너졌습니다. 

언어의 장벽이 무너진 이 순간을 46절에서는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

방언이 무엇입니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복음이 소통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다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아람어를 하고 있는데 고넬료는 로마 사람입니다. 알아들을 턱이 없는데 알아듣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방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통 많이 인식하는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신비방언’과 오순절 성림 강림 때와 오늘 등장하는 ‘지역방언’이 있습니다. 

오순절에도 각 나라 사람의 언어의 장벽이 헐렸고 마음과 뜻이 다 통해버렸습니다. 방언했다는 장면은 바로 그런 장면입니다. 

 

설교란 무슨 문자를 따지고 무슨 이치를 따지는 논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오는 감격입니다.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내 생명을 걸고 응답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성경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알아듣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성경을 읽을 때에 빨리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마는 여러분, 성경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마치 생선을 졸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선을 졸일 때 다 양념을 한 다음에 은근한 불로 졸여야 한다고 합니다. 

약하게, 불을 약하게 하여 느긋이 익혀야 하는데, 성질 급한 사람은 불을 세게 해 놓고는 이리 뒤지고 저리 뒤지고 뒤적거리다가 그만 생선의 모양을 다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도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내 인격이, 내 지식이, 내 영적인 성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줄 아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리 뜯어맞추고 저리 뜯어 맞출 생각마시고 그대로 읽으십시오.

성경 원문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그렇게 읽어나가노라면 성령이 감동하는 

중에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내가 성경을 읽고 있지만 내가 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부지런히 읽으십시다.

그리하면 그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붙들고 나를 인도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이 소중합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자식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재산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옆에서 울고 있는 자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누가 위로를 주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말씀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내가 읽고 감동받은, 내게 성령으로 말씀하시던 바로 그 말씀 그 구절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 오직 말씀에 우리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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