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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10: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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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의 가요 ‘바위고개’ 가사 중에 ‘10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였습니다. 머슴살이가 아니라 노예살이입니다. 그것도 10년이 아닌 430년입니다. 

할아버지도 노예, 아버지도 노예, 나도 노예, 내 아들도 노예로 살았습니다. 

 

머슴과 노예

고용주의 집에서 주거하며 새경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업임금노동자. 

대개의 경우 주인집에서 기거하며 가족의 일부로서 의복 ·식사 ·술 ·담배를 제공받는 외에 일정한 사경을 받는다.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인도하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그 지긋 지긋한 노예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이제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 땅을 벗어나자마자 고속도로가 있어도 좋을까 말까인데 이들 앞에 홍해가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가는 길임에도 가로막는 일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제 은혜 받아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는데 꼭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좋을텐데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이럴 때 나타나는 반응이 크게 두 가지인데, 

건강하지 못한 신앙인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은 ‘왜’ 라는 물음표입니다. 

‘왜’ 라는 질문은 생활에 있어서 유익한 면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왜’라는 질문을 할 때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질문일 때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왜 내가 참아야 합니까? 왜 내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합니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의 표현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머무는 가정,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는 절대로 하나님의 생명력이 만들어지지를 않습니다. ‘왜’라는 물음표 신앙의 사람들의 대체적으로 보면 사안마다 ‘안 된다. 못 한다.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러나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댑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입은 쉬지 않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말하며 

끝없이 불평과 원망을 토해 냅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신앙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다른 사람들까지도 부정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갑니다.

 

성경에서 부정적인 ‘왜’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가장 많이 한 사람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저는 선지자 요나라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계속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니느웨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까?’ 

‘왜 저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까?’ ‘왜 내가 가야 합니까?’ 

요나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왜’를 외치며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에서 ‘왜 물이 없느냐? 왜 야채와 고기가 없느냐?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나와 고생을 시키느냐?’고 시작부터 끝까지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노래하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사건 사건 속에서 ‘왜’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질문을 던지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가운데 그 불평과 원망이 생활의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며 축복하시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름 앞에 ‘왜’라는 말보다 ‘어떻게’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개하게 해야 하는데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고 말씀하시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사야는‘ 하나님, 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뒷걸음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이사야의 응답은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입니다. 

‘어떻게’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헌신해야 하는 일 앞에서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손과 발로 헌신하며 섬깁니다. 헌신하지 못하는 핑계를 말하기보다 해야 할 어떻게 그 일을 해결해야 할지를 먼저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아 저렇게 섬기는 것이구나’하는 감동을 줍니다. 

 

우리 신앙의 삶은 어떻습니까? ‘왜’가 많습니까? ‘어떻게’가 많습니까? 

여기 모인 우리 가운데서 불안을 느끼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한 것 같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점에서 불안과 두려움이란 연약한 우리가 평생 함께 걸어가야 할 반갑지 않은 길동무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불안과 염려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방황할 때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십니다. 

좋을 때는 “고맙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조금만 힘들고 어렵고 덜 도와주는 일이 있으면 섭섭하다하고 아우성치고 탄식하는 존재, 바로 그런 것이 가장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려움을 풀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남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자식이 못마땅하거나 조금 잘못 되었을 때, 당신이 자식을 이렇게 키웠다고 아내에게 탓을 돌리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실직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는데 이것을 다 남편에게 책임을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내가 세상 중에서 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몸은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서 함께 산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불러낸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늘 나라 사람으로서 살아갈 방법을 알려주시고 그들은 하늘 나라에서 살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삶의 모습이 다릅니다. 나도 힘들지만 다들 힘들어서 아우성칠 때 든든하게 서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나도 모자라지만 내 주머니를 열어서 나보다 더 모자라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아니면 바로 애굽의 군대에 의해서 죽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위기 앞에서 초연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에게 달려가서 항변합니다. 애굽에 공동묘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죽게 하느냐?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다고 원망합니다.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환경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두려움은 범죄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던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난 첫 번째 변화가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사라지고 불안과 공포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두려워 나무 그늘 밑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두려움이라는 것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멀어질 때에 찾아온 것입니다. 

 

다음은 모세의 반응입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전쟁에서는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아니면 살기 위해서 도망을 쳐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경험. 

문제는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느냐,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환경만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는 바다요, 뒤에는 군대라고 한다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립니다. 

본문의 모세가 그랬습니다. 사방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방이 꽉 막혔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위를 바라보아야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 모세는 손에 든 지팡이로 홍해를 쳤습니다. 그러나 이 지팡이는 보잘 것 없는 마른 막대기입니다. 그 당시에 모세의 지팡이 외에도 수많은 지팡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인 모세가 든 이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마른 막대기와 같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홍해를 갈랐던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믿음의 지팡이를 높이 드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의 지팡이로 여러분 앞에 있는 홍해를 내리치십시오. 어떤 고난과 좌절 속에서도 하나님만 붙들고 나가면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홍해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우리 모두를 위하여 행하시는 기적의 산 증인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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