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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 받는 그릇 (디모데후서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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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릇의 종류, 

‘사발’ 사기로 만든 국그릇이나 밥그릇을 말합니다. 

‘주발’ 놋쇠로 만든 밥그릇을 말합니다. 

‘중발’ 작은 주발을 말합니다. 

‘종발’ 중발보다는 작고 종지보다는 조금 넓고 평평한 그릇을 말합니다.

‘바리’ 놋쇠로 만든 여자 밥그릇을 말합니다. 

‘쟁첩’ 반찬을 담는 작은 접시를 말합니다. ‘반병두리’ 둥글고 바닥이 평평한 놋쇠 그릇으로 국수나 떡국을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양푼’ 음식을 담거나 데우는데 쓰는 그릇을 말합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그릇들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음식에 맞는 그릇을 정말 다양하게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고 음식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서 맛과 품위가 달라진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정말 다양한 재질로 다양한 모양과 다양한 용도의 그릇을 

사용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밥상에 다양한 음식을 담아내기 위해 다양한 그릇들이 쓰임을 받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쓰임을 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일꾼들은 과연 몇 이나 될까요? 모세나 여호수아처럼,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바울이나 디모데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쓰실 수 있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 인간들을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기대 그리고 목적 없이 태어난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은사와 재능과 재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과 재물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최근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변 여러 크리스찬들의 간증들을 들으면서 

‘주를 위하여 쓰면 그것이 물질이든, 지식이든 하나님이 형통하게 풀어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들 중에도 금과 같은 사람과 은과 같은 사람 그리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아마 금그릇과 은그릇 같은 사람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금그릇과 은그릇과 나무그릇과 질그릇을 다 쓰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금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은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기죽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대부분은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나무 그릇과 질 그릇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7,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합니다. 

‘금이냐? 은이냐? 나무냐? 질이냐?’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와 같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 쓰임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주를 위하여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을 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선순위에 가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척도 하고 정말로 꽤 하나님을 아는 듯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래도 세상은 세상이다 라고 합니다. 

즉 인생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고 세상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우선순위에 가지 않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하고 죄중의 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죄의 뿌리가 욕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입니다. 

욕심은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여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묶인 것들이 풀리고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우리들 마음에 들어가면 일어나는 현상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무슨 은혜를 주셨는지 모두를 잊어버리는 영적 치매 현상에 걸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양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자기 욕심을 버릴 때부터 가능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됩니다. 

저는 그래서 주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은  주일성수와 흠 없고 온전한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는 참으로 쉽지 않은 몫입니다.

재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도 쉽지 않습니다.

1440분의 1/10은 144분 2시간 24분. 

그러나 그 쉽지 않은 일을 통하여 우리는 주를 위하여 쓰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기독교의 신앙은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실천할 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하는 신비스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 없이는 신앙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통해 신비스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인생의 어려움들이 풀려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주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먼저 싸우셔서 승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보시는 중심의 두 번째는 깨끗함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도 아니요 은 그릇도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정말로 귀히 여기시는 것은 깨끗함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치명적인 무기는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 온 여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나이든 장로부터 어린 사람들까지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고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용서로 끝내지 않고 죄로부터의 분리를 요청하셨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성도는 용서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어두움을 떠나며 죄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은 정말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깨끗한 그릇으로 살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세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가 문화가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죄가 문화가 된 세상이란 죄를 짓지 않고는 쉽게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끗하면 오히려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 안 짓고 어떻게 살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는 살 수 없는 세상. 그러므로 웬만한 죄는 죄로 여겨지지도 않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저와 여러분들의 대부분은 죄에 대하여 둔감해가고 있습니다. 성경도 자의적으로 해석. 순교자들의 삶은 성경대로 살아갔던 사람.

우리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보편화된 죄의 문화에 익숙해져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를 짓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피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죄에 대하여 얼마나 대항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죄를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마태복음에서는 ‘애통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면 시편에서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 형통한 삶을 원하십니까? 묶인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진정으로 풀려나 형통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여러분 정말 원하십니까?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시면 됩니다. 

주가 쓰시겠다하시면 인생의 모든 묶인 것들이 풀릴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확신합니다. 

그런데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싸워야 합니다. 

자신과 싸워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쓸 수 있을 때까지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새하늘 교회 교인들 만이라고 그렇게 싸워 하나님께 대한 인색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 새하늘 교회를 들어 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신 깨끗한 그릇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세상이 그를 묶을 수 없습니다. 자연히 형통하고 복 받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은 모든 분들이 하늘나라를 침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천국과 축복을 쟁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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