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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는 습관 (히브리서 1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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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Fragment-->남태평양의 한 섬에 살고 있는 식인종이었다가 회심한 어느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커다란 항아리 옆에 앉아서 성경읽기표에 따라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을 때 한 인류학자가 다가와서 “무엇을 읽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인류학자는 코웃음을 치며 “현대인들은 더 이상 그 책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세요? 그 책을 읽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그 식인종은 그 사람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펴본 후 천천히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책이 아니었다면 선생님은 벌써 저 항아리 속에 요리가 되어 저장되어 있을 겁니다.” 

복음은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을 먹지 않겠다. 열받을 때 먹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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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018년 성탄절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내일이 성탄절 전야,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내일 모레가 성탄절입니다. 

부활절 앞에 사순절이 있듯이 성탄절 앞의 사 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어드벤트(Advent), 성탄절까지의 준비기간을 말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 마지막 주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의 자세와 준비를 가지고 성탄을 맞이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세상의 왜곡된 문화에 휩쓸리지 말고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탄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Merry Christmas! 성탄절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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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만큼 미래에 대한 약속과 꿈을 말한 책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요셉에게도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환경으로 볼 때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고 

그 비전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주신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사야에서는 그 보다 더 큰 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 탄생 700여 년 전에.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이게 복음입니다. 영어로는 good news.

더 나아가 미가에서는 태어날 장소까지 특정하고 있습니다.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리고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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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본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소망의 시작입니다. 

저도 그 분을 만나기 전에는 의미도 없이 목표도 없이 인생의 나락 가운데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제 빛 되신 그 분을 영접한 후로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의미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그 분만이 세상의 소망이십니다.

이사야는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어둠의 날이지만, 기쁨의 날은 반드시 도래하고 말 것.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이런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 어둠의 날을 견디는 힘이 됩니다.  

믿음이란 남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 용기(courage to be different)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기적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기적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 속에 내가 구원받는 기적, 

내가 변화되는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굿 뉴스, 복음이었습니다. 

대림절은 약속하신 그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묵상하며 보내는 기간입니다. 그 분만이 소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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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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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에서 정어리 떼의 습성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습니다. 비행기, 아마 드론이겠지요, 에서 바다를 카메라로 잡았는데 바다가 검은 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저렇게 바다의 넓은 부분이 검은 색을 띠고 있을까 궁금해 할 때, 이번에는 카메라가 바다 속의 장면을 잡았습니다. 수백 만 마리의 정어리 떼가 새까맣게 모여 있는 것입니다.

해설하는 분이 정어리 떼가 모여 있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모여 있으면 덩치가 커 보여서 웬만한 포식자들은 덤벼들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또 하나는 뭉쳐서 떼로 다니면 포식자는 도대체 어떤 녀석을 공격 목표로 잡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기 때문이랍니다. 

한 마디로 정어리 떼의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정어리들은 본능적으로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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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에는 카메라가 돌고래 무리를 잡아 보여줍니다. 

돌고래는 이 정어리 떼를 공격하기 위해 모여듭니다. 그리고 돌고래들은 

나름대로 정어리를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바로 정어리 떼 한 복판으로 덤벼들어서 그 무리를 흩어놓는 것입니다. 

흩어진 정어리들은 바로 다시 모여듭니다. 돌고래들은 또 다시 흩습니다. 

정어리들은 또 다시 모입니다. 이런 흩고 모이는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일부 정어리들에 무리에서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이 때 기다렸다는 듯이 돌고래들은 그 낙오자들을 잡아먹습니다.

저는 이 광경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인 싸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떨어지면 죽는다. 

오늘 설교 본문은 이래서 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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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냥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정복 전쟁, 우리도 영적 전쟁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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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시절부터 성도들은 모이기에 힘써왔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함께 모여 교제했습니다. 

그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고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탄은 이 모임을 흩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모이지 못하게 하고 이것을 하나의 습관이 되도록 해 왔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든 성도들이 하나 둘씩 모임에서 이탈해 갔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결국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갔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에 성도들이 모이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이런저런 이유로 성도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핑계거리를 만들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그 시험에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모이는 일을 게을리 하고 결국 모이지 않는 잘못된 습관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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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교인’입니다. ‘안 나가’를 거꾸로 읽으면 가나안이 되어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지만 나는 신앙인이라고 믿는 사람들. 서구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 또는 ‘교회 없는 크리스천’(unchurched Christian)이라 부릅니다.

인터넷, 안타까운 것은 이런 분들은 신앙하고는 점점 먼 내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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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선교부 회의를 갔다가 논산훈련소 연무대 교회를 방문했던 목사님으로부터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병사를 만났는데 명찰에 ‘김모세’라고 붙어있더랍니다. 

당연히 크리스찬인줄 알았는데 법당으로 들어가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그 병사와 이야기를 해보니 아버지가 교회 장로이고 어머니는 권사인데 자기는 절에 다니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청년부를 다니다가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는데 

사귀는 자매가 절에 가보자고 해서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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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보면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러면 왜 모이는 습관을 길러야 할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배는 크리스찬들의 특권이지만 의무이기도 합니다. 

십계명에도 제4계명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우선 모이면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성회로 모이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 때 저들이 성령 강림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모이면 서로 힘을 얻습니다. 사도행전 2:42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런 과정 가운데 성도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해 갔습니다. 

또한 서로 나누면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모여 예배 드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같이 교제하고 떡을 떼고 같이 중보했다고 합니다. 

모이면서 영적인 공동체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는 너희는 다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라고 합니다. 

절망 속에서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 이 시대에 여러분들이 할 일은 사단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힘껏 모여서 함께 은혜 받고 그 은혜를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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