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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속의 평강 (마가복음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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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환경에 대처하는 스타일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집니다.
첫째는 환경에 좌우되는 종속적 인간입니다.
환경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섞이면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슬퍼하고, 누구를 비난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같이 비난하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의 인격은 오로지 환경의 산물일 따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반항 체질의 인간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일단 반항부터 하고 봅니다. 남의 말을 다 들어 보지도 않고, 깊이 생각해 보는 법도 없이, 무조건 ‘노우’입니다. 반항이야말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항으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려는 것, complex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셋째는 환경 초월적 인간입니다.
일이 잘된다고 교만하지 않고, 억울함을 당해도 노하지 않으며, 야단스럽게 떠드는 자리에 가서도 고요함을 유지합니다. 진정한 자존감, ‘주체의식’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환경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격자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갈 길은 가고, 버릴 것은 버립니다. 엄연히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는 인격, 바로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41절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에 나타난 바와 같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에 놀라는 제자들의 반응으로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놀랐읍니다마는 참으로 놀라야 할 것은 그 능력이 아닙니다. 풍랑 때문에 놀라는 것도 어리석지만 풍랑을 고요케 하시는 그 능력 때문에 놀라는 것 역시 유치한 반응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고요하게 주무시는 바로 그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풍랑과는 아무 상관없이 초연하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샬롬, 평강 이것을
보고 본받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의 고요는 고요한 환경 속에서의 고요가 아니라, 소란한 환경 속에서 마음의 평강을 얻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고요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어 사는 사람들은 세상일에 그다지 놀라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일에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35절로 시작합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우선 35절에서 생각해 볼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저물 때에, 밤에 항해 하는 게 맞지 않습니다.
순종해서 갔는데 풍랑을 만납니다. 자신이 자초한 것은 풍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 말씀대로 살았더니 어렵더라, 주일 성수했더니 사업상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 십일조 했더니 경제적으로 어렵더라.
40년의 대장정이 끝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요단강이 가로막고,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 믿음으로 뚫고 갑니다.
풍랑을 통하여 우리들의 믿음은 자라갑니다.

생각해 볼 두 번째 문제는 예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건너가라고 말씀한 것도 아니고 내가 건너가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건너가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아주 중요한 속성이 나타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공동의 작업이에요. 파트너십입니다.
한쪽만을 강조하다가 실수합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 내 신앙을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에 나만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교회는 저와 여러분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인생에서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이지 환경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 문제도, 격동하는 사회 문제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믿음의 문제라고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믿는 확실한 믿음,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내 운명을 좌지우지 하시고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당하실 수난과 그 후의 부활을 예고합니다. 32절은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 중에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고요하셨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다음날 아침이면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긴장된 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눈 앞에 십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모욕적인 빌라도의 재판도 있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고독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왜입니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영어에서 보통 큰 것을 big 혹은 great 라고 하는데 아주 큰 것을 나타낼 때는 mega라는 말을 씁니다. 이 mega라고 하는 단어가 ‘메갈레’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주, 굉장히 크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원어 성경으로 보면 ‘메갈레’라는 말이 대구적으로 두 번 나옵니다. 37절의 ‘큰 광풍이 일어나며’에서 광풍의 크기를 말할 때에 쓰였습니다. 원문을 보면 ‘메갈레 아네무’라 했습니다.
광풍 중에서도 아주 메가톤급 광풍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명령하여 바다가 고요해진 장면에서 쓰였습니다. 39절의 ‘아주 잔잔하여지더라’에서 역시 메갈레가 쓰였습니다.
‘갈레네 메갈레’ 아주 큰 메가톤급의 고요함이라는 뜻입니다.
큰 광풍이 메가톤급이라면, 고요함 또한 메가톤급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그리스도의 크신 능력이 고요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성령 충만함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바라보기에, 내 생각이나 내 지혜와는 다르지만 이 풍랑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큰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그 많은 사건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오직 하나, 헛된 믿음을 다 버리게, 그리고 참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았다면 내 잘못된 믿음 고쳐주시느라고 있는 일입니다.
못 믿을 것을 믿고 있고, 믿어서는 안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른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사건은 터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풍랑으로 인하여 괴로워 하십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겪는 이 풍랑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이것을 믿는 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사람들은 격동합니다. 벌벌 떱니다. 소란을 피웁니다.
이것이 가장 나약하고 불신앙적인 태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떠든다고 해결이 됩니까? 밑으로 내리달을 뿐입니다.
이 풍랑, 이 격랑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 39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꾸짖는다는 말을 원문에서 찾아보면 ‘에피티메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귀신을 내어 쫓을 때 사용된 단어인데 이것은 비타협적인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풍랑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명령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내가 풍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요함으로 격랑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격랑을 밀어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초연한 모습입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터툴리안은 말했습니다.
“교회는 배요, 세상은 격랑하는 바다이다.”
항해 중에 배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절대고 침몰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귀한 뜻이 그 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풍랑을 고요함 가운데 맞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평화, 이 고요함 속에 능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요한 중에 고요가 아니라
풍랑 속의 고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풍랑 속에서도 조용함을 찾아 쉬시던 주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고요함 속에 고요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은 어디에나 고요함이 있습니다.
풍랑 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면 고요하고, 고요한 바다에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전쟁과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Date: 2016/04/17 11: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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