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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 (사무엘상 7:12-14, 마가복음 8: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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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친구들하고 점심을 하다가 젊은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들.

이효리, 소녀시대, 아니라고 하면서 아무도 그 이름을 대지 못합니다.

머리도 돌아갈 때 공부해야 합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항상 건강하게 살면 제가 잘나서 

건강한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루 하루 건강을 지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제 건강에 대하여 감사하느냐 하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서야 비로소 건강했을 때가 얼마나 고마웠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렇게 미련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평범한 중에 일상생활에서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별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주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무사하다는 것, 평범함 속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환난을 막아 주시기도 하시고, 피해 가게도 하시고, 환난을 비켜 가게도 하실 때에 우리는 이것을 은혜로 깨닫지 못합니다. 

꽝하고 부딪쳐야만 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운전할 때 얼마나 많은 위험이 있습니까?

그런데 내 차가 부딪쳐야 비로소 지금까지 사고없이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상도 유치원 붕괴 사고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원인들은 그 안에서 이미 벌써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큰 사건에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사실은 평범한 중에 주신 은혜가 훨씬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의식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되 구체적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그리고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 얼마나 확실하고 귀한 간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사기 7장을 보면 무장한 미디안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옵니다. 

이스라엘은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저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라고 하는 사람을 부르셔서 ‘기드온아 네가 이 백성을 건지라’ 하십니다. 기드온은 여쭙니다. 

내가 뭘 가지고 건지라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보니 3만 2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저쪽은 수십만 명의 훈련된 군사요, 이쪽은 오합지졸입니다. 

3만 2천을 가지고는 도저히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3만 2천도 너무 많다, 줄여라 하십니다. 그래 만 명으로 줄였습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많다, 또 줄여라. 이렇게 하다가 결국 남은 사람은 겨우 3백 명입니다. 

기드온은 기가 찼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순종은 하지만 이 3백 명으로 어찌 저 수십만 대군을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전쟁은 내가 한다, 너희가 숫자가 많으면 이긴 다음에 ‘우리가 싸워서 이겼다’ 할 것이 아니냐, 그런 교만을 나는 못 본다, 숫자를 줄이고 보니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시편 24:8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저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 우리가 나가서 싸우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이 기적이 있었다’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십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디베랴 바다를 건너가시는데,  배 안에는 떡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바로 책임 소재를 추궁한 것입니다. ‘왜 떡이 하나 밖에 없느냐’

‘이것은 회계 맡은 유다의 책임이다, 베드로는 수제자라고 하면서도 그런 것도 챙기지 못했느냐?’ 누구의 책임인지 서로 변론을 벌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께서는 오천 명도 먹이시고 사천 명도 먹이시는 이적과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저들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병이어를 목격한 제자들이라면 적어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한테만 딱 붙어 있으면 ‘밥 걱정 안해도 되겠다, 경제 문제로 걱정 안해도 되겠다’ 이것만 깨달았어도 변론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는데 떡 한 개로 열두 명을 못 먹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깨달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행복하면서도 스스로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행복은 가진 것을 사랑하지만 불행은 갖지 못한 것을 사랑한다.

우리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 처지가 가장 좋다고 하는데 나는 내 생에 대한 긍지가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깨달음과 정비례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문할 때에도 정신을 잃으면 중단한다고 합니다.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을 때려서 무엇합니까? 징계도 깨달음이 있는 자에게 유효하지 감각이 없는 

둔한 자에게는 무효합니다. 

그러면 왜 깨닫지 못합니까? 깨달음이 없는 이유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 안에서 물러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지식을 수용하는 만큼 발전하게 됩니다. 

늘 자기 생각만 옳고 남의 말은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항상 본인 자신도 어둡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듣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망할 때는 귀부터 먼다고 합니다. 듣는 귀가 없으면 망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 많은 말씀을 하시면서도 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결론을 맺으십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듣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다음에는 은혜를 기억하고 기적의 현재성을 믿어야 합니다. 

예전에 기적이 있었다면 오늘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역사가 결코 옛날 이야기일수 만은 없는 것입니다. 

내게도 똑같은 기적이 나타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과거의 그 큰 기적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기적과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마다 근심 걱정하는 것은 어제의 기적의 뜻을 몰랐고, 설사 기적의 뜻을 알았다 하더라도 망각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인도로 살아왔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지 2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셔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40년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의 기적도 여러 가지 경험하였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 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인지 알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와서 가나안의 우상을 섬깁니다.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신은 농경 사회에서 필수적인 농사의 신,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니까 보기 좋아 보여요, 그래서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아주 버리지는 못하지만 때가 되면 바알을 섬깁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그래서 믿는 사람과의 혼인이 중요한 겁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우상을 제하라, 너희는 쓸데없는 정치적 타협이나 종교적인 타협을 하지 말고, 깨끗하게 모든 우상을 다 진멸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라, 그러면 블레셋으로부터 지켜주시겠다 하십니다. 

그리고는 사무엘이 미스바 성회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스바에 모여 있는 바로 이 순간을 기회로 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 옵니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의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 있고, 그 속에 군사들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블레셋 연합군이 모여서 저들을 포위하고 다 없애 버릴 생각입니다. 의기양양 쳐들어 옵니다.

그래서 7장을 읽어 보면 미스바에 모인 이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전쟁 준비도 하여야 하지만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젖먹는 어린 양을 온전한 번제로 바칩니다.

그리고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친히 우레를 내려서 블레셋 사람들을 다 흩으시고, 저들이 흩어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가서 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두가 나가서 이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기적이 언제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령이 불탈 때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우리 하나님의 우레 소리가 내 생활 속에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부터 여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했고,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그래서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잘나서 오늘까지 살아왔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습니까? 우리 민족이 바른 길을 갔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셔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바른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조용한 기적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하나님이 도우신 결과를 알아보겠습니다. 

13절에서 ‘블레셋이 굴복'을 했습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14절에서 ‘잃은 땅’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14절에서 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바로 그 은혜에 대한 기념비적인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먼저 내 우상을 제거하고,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저기까지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남은 생을 새롭게 살아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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