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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얼굴 (요나 1:1-3)

목사님 0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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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들의 중보기도에 힘입어 독일 선교사 모임에 잘 다녀왔습니다.

앞당겨 월요일에 귀국. 독일에 가보니 2017년 2월에 갔던 추억.

 

종교 개혁의 3대 기치 중의 첫 번째가 Sola Fide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늘 나라에 간다, 천국입장권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에 믿음의 분량, 크기는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아는 만큼 믿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6장 3절에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러분,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강조했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도 잘 드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지식으로, 교리적으로 알았을 뿐, 인격적인 하나님을 삶에서 경험하고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로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의 지성적 능력과 이성적 기능을 발휘하여 판단하고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받아들여 아는 지식입니다. 

또 하나는 경험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알고, 자신이 부딪쳐보고서 아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이 중에서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의미는 히브리어로는 야다라고 하는데 

‘야다’라는 단어는 ‘체험적으로 안다’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부부가 알아 가는 것. 살아 보지 않으면 몰라. 

 

성경을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유일하신 전능자이심을 아는 지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귀신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을 우리들보다 훨씬 더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귀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 분의 인도는 항상 

옳다고 믿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치고 신앙생활을 잘해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그만 신앙적인 방법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봅니다. 

어찌하여 선택의 순간에 결단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것일까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깨달음을 주실 때 성령님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감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데 눈뜨면 이성적인 생각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에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옛 상태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변화되지 못하니까 하늘 나라를 침노해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늘 마음이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저 하늘에 있는 별과 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사람들은 방법을 찾고 프로그램을 찾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찾지 않으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바로 예배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 부름받은 기관입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래서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제사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죄인들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제사를 통하여 나아갑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제사를 통하여 죄인된 인간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제물을 준비해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 제물의 첫째 조건이 온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흠이 있어서는 안 되고 부분이 아닌 전부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은 깨끗하고 정성이 담겨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양이 문제가 아니고 질이 문제입니다. 

구약에 보면 부유한 사람은 소를 제물로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을 드리고 그보다 못한 사람은 양의 새끼를 드리고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미리 예배에 참석, 늦지 않게, 10시 45분에 찬양 시작.

 

오늘 읽은 본문인 요나서 이야기는 여러분 대부분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치다 폭풍을 만나 바다에 던져져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 여로보암 2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요나가 등장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는 북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가장 흥왕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시기에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요나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임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임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요? 

말씀이 임하면 결단을 해야 하고 내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변화.

말씀이 임해도 불순종하면 BEST가 아니라 second level의 삶.

아브라함은 고향에서 편히 여생을 보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방랑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소심한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치라는 말씀.

아모스 선지자는 남유다에서 뽕나무를 치던 과수지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북이스라엘로 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흑금성.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우리의 소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역사에 대해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동쪽 니느웨의 정 반대쪽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 가보면 기원전에도 유대인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를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인간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모세도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출애굽기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아론.

이사야 6장,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 숯불로 지짐

예레미야 1장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소명, 거부, 설득, 사명

우리 하나님은 대화하고 설득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말씀이 임하였느냐 하면 2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저 큰 성읍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왜? 하나님이 니느웨에 말씀을 전하라는 이유는 그들의 악독 때문입니다.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행하는 악행에 의해서 가난한 자, 약자의 고통과 비명 소리가 하나님 귀에 들렸다는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이유를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에스겔 16:49, 50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우리 사회에 여기저기에서 비탄과 한숨의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못살겠다는 부르짖음입니다. 억울하다는 하소연입니다. 

비정규직의 불안의 소리, 자영업자의 한숨 소리, 청년들의 체념의 소리, 정의와 상식을 강탈당한 자들의 분노의 소리가 대한민국을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부르짖음이 가득한 사회는 불안한 사회입니다. 

하나님은 이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한숨과 부르짖음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간구입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귀를 가지고 세상의 신음 소리에 귀 기울여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3절을 보면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기에서 사용하는 단어 ‘마침’은 정말 묘한 단어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때나, 하나님의 뜻을 표현할 때도 사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말씀을 제대로 알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12: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별 할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사람의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우선 그 사람의 식성이나 성향이나 취향도 다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자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피해갈 때에 마침 시기에 딱 맞게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의 인도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잘 되어지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착각했습니다.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다가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이 때 요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께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신 게야. 그래서 이렇게 나를 다시스 가는 배를 만나도록 하신거야! 하면서 이 배를 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배를 타고 떠나면서 안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5절에서처럼 배 밑바닥에 누워 깊이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시편 139:7-8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주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분이 전능하고 전지하신 분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곳에 숨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낼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것이 요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사야 9:7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타락한 세상을 원상태로 돌려놓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시었습니다. 그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소망도, 우리 사회에 대한 소망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리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려내시리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쉬임없이 닥쳐오는 인생의 문제들 가운데서도 지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거짓말하지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정작 그 바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에게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인생의 진정한 성공자들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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