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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장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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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교회에 젊은 목사가 새로 부임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 해 따라 극심한 가뭄, 시골 교회는 새벽예배가 4시 반인데도 

할머니들이 와서 기다리신데요, 목사가 아침 저녁으로 쎄게 기도.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멈추지를 않아서 홍수가 나서 농사가 폭삭.

교인들왈, 젊은 목사가 와서 힘 조절이 안되서.

 

16일 이후에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살만하시지요?

15일은 광복절이었고, 16일은 말복.

갑자기 시원, 함석헌 선생이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 

왜?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물론 안중근, 유관순, 하나님이 쓰신 사람.

우리 새하늘 교회 교인들의 삶도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

로마 시대에도 카타콤에 숨어 살던 사람들.

항상 어려운 건 일제 시대에도 순사들이 독립투사들에게 하는 말.

1987에서도. 너 하나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아. 이탈자.

항상 이탈자들이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도 이탈자들에게 쓴 서신.

그런데 그렇지 않은 걸 우린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크리스찬 한 분으로 인하여 주변이 변하여야.

 

요즈음 뉴스를 보면 죄인을 다루는 자도 죄인이요, 죄인을 재판하는 자도 

죄인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몽땅 죄인입니다. 

그래서 인간부재라고들 합니다. 사람이 없고 일꾼이 없고 지도자가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안창호 선생님.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인물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도자이어야 합니다.

 

광복절, 사진, 

저녁에 태극기를 거두어 들이려고 방충망을 잠깐 열었는데 벌레가.

보이지 않았는데.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사람 된 값어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용모나 그가 지니고 있는 재산이나 지식의 정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 누구를 위해 일하느냐, 무엇에 쓰임받느냐, 이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값어치가 평가됩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람을 먹고 삽니다. 

흔히들 잘 먹고 잘 입어서 행복한 줄로 착각합니다마는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면 행복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 한 사람이라도 진정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내가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 시간에도 나를 꼭 필요한 존재로 보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 심지어 내가 생각해 볼 때에도 내가 불필요한 존재로 보일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내가 없어서는 안될 존재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 나를 이 땅에 두신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나 우연으로 내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행복을 맛보고 존재의 가치도 느끼게 됩니다. 

 

아시는 대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크게 쓰임 받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름을 받았던 당시에는 말할 수 없이 처량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가 남들이 말하는 좋은 처지에서 하나님께 부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살인자요 도망자였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체포될 것이 두려워 도망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마음 놓고 사람을 만날 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은둔과 피신으로 이어지는 방랑자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심신은 늘 불안하고 불안정했을 겁니다. 

 

그리고 모세는 처가살이하는 양치기입니다. 

처가살이가 반드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제국 애굽의 왕자로 살아가던 사람이 전락하여 별 볼 일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재산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 이제 모세는 처갓집의 양을 치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의 존재가 무엇이고 장차 나의 계획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들은 전혀 의미가 없어지고 처갓집 양을 이끌고 광야나 헤매는 별 볼 일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나이 여든이 되었습니다. 

온전히 나를 포기한 상태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바로 그런 때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러고는 엄청난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가 너로 하여금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게 하리라”

깜짝 놀란 모세의 고백이 11절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 내가 누구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죄를 지은 도망자가 아닙니까? 이 처량한 꼴로 40년을 썩어온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이 너무 크고 위대한 것인데 나의 형편이 그런 일 하기에는 당치도 않게 초라하고 비참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의식적인 자기 비하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진정한 자기 고백입니다. 

그의 약함과 구제불능과 비참한 모습을 액면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백성을 제발 구원케 해 주세요’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나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하게 해 주세요, 지도자가 되게 해 주세요, 이 백성을 구원하게 해 주세요, 보람있는 생을 살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중점 내용은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고, 모세는 

단지 그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모세가 하나님께 붙들리어 하나의 그릇으로 쓰임받고 있을 뿐입니다. 

부름 받는 그 순간에 그는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버려졌던 과거, 잊혀졌던 옛일이 이제 새로운 의미를 띠고 떠오르게 됩니다. 

보십시오. 그가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해서입니다.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 강에 버려지고 정처 없이 떠내려 가다가 바로의 공주 앞에 닿고 그 눈에 띠어 40년 동안을 애굽의 궁전에서 자라나지 않습니까? 그는 그 곳에서 애굽의 모든 문물을 공부하게 되고 지도자로 훈련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결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애굽의 궁전에 살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기 위해서 진작에 설정해 놓으신 소중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그는 광야로 내쫓겨 양을 치는 목자가 됩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그야말로 코가 땅에 닿도록 낮아질대로 낮아집니다.

꺾이고, 찢어지고 완전히 자기를 버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중동 지역에 ‘양을 쳐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미련한 양을 치면서 많이 생각하고 인내와 사랑과 지도력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격언입니다. 

긴 세월 그 40년, 어찌 우연이었다고 하겠습니까? 

이윽고 모세가 부름을 받는 그 순간, 

그때 하나님께서 먼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한 장소에 가면 신발을 벗습니다. 먼지가 심한 길을 다녀서 신발이 워낙 더럽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과거와의 절대 단절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장 해제와 같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의 과거 생활에 대해서 전혀 묻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돈은 얼마나 남겨 왔느냐?’ 이렇게 묻지를 않습니다.

전혀 묻지도 않았을뿐더러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이것이 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묻지 않으시는 과거를 내가 왜 묻습니까? 거기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과거와 얼마나 깨끗하게 단절할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미래를 향한 추진력의 바로미터가 됩니다. 

과거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혼이란 미래를 향한 약속인 동시에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완전한 청산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애인이 몇 명이었든지 간에 결혼하는 그 순간부터는 깨끗이 청산하여야 합니다. 결별하여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부르시면서 과거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도 지난 날의 성공을 가지고 무슨 큰일이나 한 듯이 교만해서도 안되며,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하여 자포자기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네 신을 벗으라’, 이것이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40년 동안 양을 치던 목동이 이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히브리 민족들을 이끌고 나와야 하는 그 순간에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습니까?

여든 노인이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어디를 가고 어디를 옵니까?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어 주세요. 이대로 살다 죽으렵니다.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타성에 젖는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중학교 때 목발을 1년 동안 짚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1년 뒤에 목발을 제거하고 걷는데 의사 선생님이 목발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가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마 이렇게 변명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애굽에는 정녕 못갑니다.’

게다가 나는 입도 유창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내가 가라면 가는 것이지 왠 말이 이렇게 많으냐’

‘가라!’ 행동적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 생각으로 긍정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순종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를 보면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의 예수님 찬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종의 형체, 즉 예수님이 사람의 형체를 가지셨다.

종한테는 나의 감정이 깨끗하게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기분이 좋다, 나쁘다, 뭐가 어떻다 저떻다 해서는 종이 아닌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느니, 못알아주느니 이런 이야기가 종으로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에는 내 존재가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속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하나님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건 이 백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이끌 것이다. 반드시 가나안 땅까지 이끌어 갈 것이다. 

저 모세가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마는 그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를 쓰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고 

그와 나와의 관계와 소명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에 내 생은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의 그 귀한 사역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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