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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lex (열등감) (민수기 13장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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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7월부로 교회 이전하면서 졌던 빚 1억여원을 다 갚았습니다.

약 20개월 정도.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기도 싫어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은 채로 살고 싶어 하는 두 가지 테마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테마, 죽음과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과 함께 같은 영화들도 유행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고 안 보고는 여러분들의 자유, 킬링 타임, 반기독교적. 

하용조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은 죽음 후의 세계에 요한계시록 등에 표시해 놓았지만 우매한 우리들은 해석을 못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이면서 최고의 주석서 기독교 강해도 요한계시록은 없다.

 

그리고 죄의 문제, 창세기의 에덴 동산이야기도 결국은 죄의 이야기.

오히려 인간의 죄와 타락 그 불행의 원인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에덴동산 사건의 주제요 초점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야기도 그것이 뱀 때문입니까? 선악과 때문입니까?

문제의 원인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거역하고, 믿지 아니한 나머지 일어난 결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맞이하게 되는 장면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입니다. 

인간이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후 일어나는 첫 사건, 에덴 동편에서 맨 처음 벌어진 사건이 형이 친동생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참으로 수치스럽고 어이없는 일입니다. 

가인이 형이고 아벨은 동생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쳐서 양의 새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고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는지 정확한 그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사에서는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더 잘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은 이 모습 때문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결과 가인은 들에 있을 때 몰래 아벨을 쳐 죽이고 맙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믿으면 하나님이 각자에게 다르게 역사하심을 믿어야 할텐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가인의 심리상태를 한 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제사를 왜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남 탓하는 것 이게 문제입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성경에서도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읽어야.

왜 내가 남보다 더 사랑을 받을까? 내가 한게 없는데.

내가 못사는 것이 남이 잘 살기 때문입니까? 

왜 남의 행복에서 내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까?

내가 잘 안되는 것이 다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을 가인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내가 실패하고, 잘못된 것, 불행하게 된 모든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버려야 할 태도는 누굴 탓하거나 신세 한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인의식과 주인공의식.

주인공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남의 탓을 많이 합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반면에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질 때 그만큼 내 존재가 커지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할 때도 ‘나는 원래 그렇지 않았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됐다’라고 하는 분들은 남에게 핑계대는 순간 내 존재가 증발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원망할 것 없습니다. 

환경 탓할 것 없습니다. 누구 잘못이다 할 것 없습니다. 내 책임 내가 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의 존재가 살아납니다. 

더 나아가 남의 책임까지도 내가 질 수 있는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책임지는만큼 내 인생의 영역이 커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단 둘뿐인 형제 사이에서 형이 동생을 죽여야 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 가진 것을 빼앗자는 강도질도 아니요 아벨이 형한테 원한을 살만한 죄를 저지른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죽였습니까? 그저 내가 내 속을 못 이겨서 애꿎은 동생한테

화풀이를 합니다. 병든 심령이 발악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병들은 잠복기가 있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도 얼마동안은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싹이 나고야 맙니다. 일단 싹이 나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내가 스스로 조정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7절은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다스리라’ 아직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다스리라. 한계를 넘어서면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술 마시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마셔버린다.’ 

이와 똑 같습니다. 죄가 바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의 종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가 없어집니다. 

이제 죄가 주장하는데로 끌려가야 합니다. 

내 마음도, 감정도 생활도, 전부 죄가 다스립니다. 다 삼켜 버립니다. 

 

환경이나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들의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생각합니다. 환경을 생각합니다. 세상이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내 처지가 어떻고... 계속 그쪽으로 신경을 쓰고 몸부림을 치지만 중요한 것은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응하는 나의 자세입니다. 

내 태도, attitude가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생쥐 두 마리가 우유 통 속에 빠졌습니다. 

그 중 한 마리는 이게 물이라면 헤엄쳐 나갈 수 있겠지만 우유는 헤엄칠 수 없다 생각하고 살기를 포기하여 그대로 죽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마리는 ‘아직 먹을 것은 많으니까 우유를 마시면서 힘을 내자’ 하고 열심히 바둥거리면서 헤엄을 쳤더니 우유가 치즈가 되면서 딱딱해 져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똑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전혀 다른 두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는 대단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아시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갑니다. 드디어 가나안 남부의 성읍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가나안땅입니다. 바로 그 시점에 왔다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으로 인해서 회항,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지도를 그려서 보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빠른 속도로 가나안 땅 입구까지 왔다가 다시 back하여 광야로 들어가고 이후 38년을 머무르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 

그 이상한 사건의 계기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하는 말들이 오늘 본문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보고와 열 사람의 보고는 너무 대조가 됩니다. 

두 사람은 가서 어떻게 보았습니까? 여호수와와 갈렙은 말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둘이 막대기에 메고 왔습니다.”라고 합니다.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비옥하고 좋은 땅입니다. 아름다운 땅입니다. 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14:9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우리의 먹이, 먹어치우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 믿음으로 보았고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여호수와와 갈렙의 유명한 간증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 사람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32절에 보니 믿음 없이 봅니다. 땅을 악평하여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전혀 당할 수가 없다’하고 이어서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그들 앞에 서서 보니까 우리들은 메뚜기 같더라’ 

자기 자신을 이렇게 왜소하고 형편없게 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까지 부정합니다. 

불신앙적인 가치관, 불신앙적인 세계관, 불신앙적인 인생관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항상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부정적이 아니라고 하시는 분들 중에도 항상 남과 비교하여 나는 이러이러한 조건이 그 사람보다 못하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그쪽으로 보면 그렇지요. 그러나 이쪽으로 보면 다릅니다. 

신앙적으로 보는 사람과 불신앙적으로 보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인간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든 모든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늙은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연륜이 더해지고 교회에서 보낸 세월이 많아지다 보면 영적으로 성숙해 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합니다.  

영적 성숙과 영적 미숙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는 바로 가치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신앙적 가치관을 얼마나 내면화하고 사느냐,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가치관을 붙들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메뚜기 콤플렉스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왜? 메뚜기 콤플렉스를 가지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미얀마로 선교를 가서 서투른 미얀마말을 하면서 현지 사람 몇 사람을 모아놓고 여러 달 동안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반은 영어로 가르치고 반은 미얀마어로 가르치고... 이렇게 애를 써서 전도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 중의 한 사람이 나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나옵니다. 

선교사가 기쁘고도 고마워서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셨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아니요. 내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찾으셨습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찾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긍지라고 한다면 딱 한 마디로 ‘선택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다. 

이 선택교리에 그들의 신앙의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선민사상.

이 선택교리의 기본이 되는 것은 나는 무자격하다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고 그리스도인 될 자격도 없습니다. 아니, 오늘도 교회에 나올 자격이 없습니다. 왜?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도 죄 아닌 것이 있었습니까? 깊이 생각하면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무자격한 가운데서 이 거룩한 신분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가 지닐 의식입니다. 

그리고 선택받는 순간 선택받은 자의 목적과 사명을 깨닫게 되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상 섬기는 도시의 우상 섬기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부르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그 순례적 생활의 방법은 오직 순종이었습니다.

실수도 많고 허물도 많지마는 그래도 말씀하실 때마다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삽니다. 믿는 우리들에게 신앙생활이란 순종입니다. 다만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루하루 눈을 뜰 때 이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깨닫습니까? 

부족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주의 거룩한 영광을 위하여 오늘도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내가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세상을 봅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봅시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다시 출발합시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긍정적 신앙을 가짐으로써 

메뚜기 콤플렉스를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그 거룩한 역사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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