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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무슨 상관이냐? (요한복음 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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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법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당연히 교회에 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문제가 많아서 교회 못 갑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 못오겠다는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저는 실내 세차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날씨가 좋았다 흐렸다. california에는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 때문에 생긴 

제도가 rain check이란 제도가 있습니다. 세차를 했는데 24시간 안에 비가 오면 돈을 받지 않고 다시 해주는 제도입니다. 캘리포니아 날씨에 대한 자신감. 하찮은 일에도 꼭 선택이라는 것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도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을 때에 하지 아니하면 하고자 할 때에 할 수 없게 됩니다.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됩니다. 아무 때나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방탄소년단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추할 뿐입니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름 생기면 생기는가 보다 하고, 흰머리 생기면 생기는가보다 하고, 그러려니 할 것입니다.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It is normal. 자연 현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단과 싸우는 일도 이길 수 있을 때에 이겨야 합니다. 간단하게 이길 수 있는 것도 한번 때를 놓치고 나면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흔히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라’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뭐 운동이 좋다 해도 그것은 건강한 사람의 이야기지, 병든 사람에게 운동하라고 하면 그 사람 운동하다 죽습니다. 될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오늘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과거의 종교가 아니라 미래의 종교가 아니라 현재의 종교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될지 알겠더라구요.

미래가 보여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지금 상태를 보면 이 분에게 좋은 일이 생기겠구나 앞으로 어렵겠구나. 현재의 나의 상태가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언은 豫言이 아니라 預言입니다. 

너 앞으로 어떻게 되겠다 하는 것은 전자의 예언이지만 기독교의 예언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에 물려준 말을 하는 것.

 

그래서 오늘 할 일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마귀가 훈련소에서 사람을 죄 짓게 하는 법을 가르치는데 그것 중의 으뜸, Top Class는 바로 이것입니다.

‘언제나 사람을 유혹할 때 그것에 대하여 옳다 아니다, 하지 말라, 

꼭 할 거지만 조금만 뒤에 하겠다. 이렇게 유혹을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종종 이런 사람을 봅니다. 

오늘까지는 이렇게 지내고 내일부터는 바로 하겠다고, 오늘까지 이렇게 한 잔 하고 내일부터 정결하게 살겠다고,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지금 바로 이 시간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한 치도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아무 변명도 하지 마시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죽으면 죽으리라 저자로 잘 알려진 안이숙 사모님의 작사.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매일 피차 권면하여’ 매일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반복적으로 계속 두드리며 다시 한 번 점검하여야 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나, 내가 바른 신앙을 하고 있는가,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바른 관계에 있는가, 수시로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는데 그 때 제자들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한 아버지가 귀신 들린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저들이 쫓아내지를 못합니다. 

아주 부끄러운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쉽게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용히 여쭙니다.

마가복음 9:28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 말뜻은 그 전에는 내쫓았는데 왜 오늘은 내쫓지 못했습니까?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29절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며칠 전에는 기도했기 때문에 되었고 오늘은 기도 안 했기 때문에 못한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가졌던 신앙을 가지고 오늘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제 금식기도 했다고, 철야기도 했다고 오늘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바른 자세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하늘 나라에 입성할 때까지 긴장해서 기도하면서 나아가야 하는 법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입니다마는 부끄럽게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의 고민에 대하여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마는 내 생각에는 그의 가장 큰 고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일 겁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런대로 베드로는 어떻게 좀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이크 큰 일 났다. 어떻게 보나’ 이렇게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책망하고 괴로워 했을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이 허무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에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하고 옛 고향으로, 옛 직업으로 돌아갔더란 얘기 아닙니까? 그때 다른 제자들도 줄레줄레 따라갑니다. 그래서 오늘 2절을 보니 일곱 제자가 따라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서 물고기를 잡는데 이게 한 삼 년 쉬었다 하니까 그런지, 물고기도 알아봤는지 어쨌든 못 잡았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고 피곤해 있는 바로 그 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고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아주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내가 예수님이었다면 하고 좀 생각해 봅니다.

한 마디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이 녀석아 너 한 번쯤 

모른다고 하면 되지 굳이 맹세하고 나를 저주까지 했느냐?’ 한 번 물어 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과거에 대해 전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책망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엄청난 실수를 한 베드로를 놓고 오직 한 마디, 차원 높게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아가파스 메?”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네 과거를 묻지 않는다, 네 잘못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어 보십니다. 

여러분,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우리 마음에 물어야 할 가장 소중한 질문이 이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거기서 내 인생이 평가됩니다.

오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오직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오직 그것 하나만 가지고 다시 출발합니다. 인생의 기쁨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힘이 없으십니까? 

목표가 없어 지셨습니까? 

우리 모두 내가 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제 시대 말기에 조선의 많은 교회들은 큰 시련에 빠졌습니다.

일본 제국 주의가 신사참배를 강제로 시행했기 때문입니다.

신사 참배를 하자니 우상 숭배이고 안하면 일본 경찰에 잡혀가 감옥에 가야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 때에 묘한 대안이 나왔습니다. 

고개를 숙이기는 하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괜찮은 것 아니냐고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겉으로는 신사에 절하면...

대체로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몇 분은 “아니오, 누가 보건 말건 신사 앞에 고개를 숙였으면 우상에게 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했던 분들은 옥에 가거나 순교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순교란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자의 행위입니다.

적당히 넘어가는 자에게 순교는 없습니다. 한치의 양보없이 정직하고 바르게 믿음을 지킬 때 바로 이것이 순교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출발하는 이 귀한 시간에 베드로는 20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사도 요한을 가리킵니다. 옆에 있는 사도 요한을 생각하고 하는 질문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라고 질문을 합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시작.

예수님의 대답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나 잘하세요’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만 생각하면 되는데, 주님과 나와의 관계이면 되는데 왜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까?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문제는 하나님과 그 사람에게 맡기고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할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시면 

‘아멘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하면 되는데 이 시간에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왜 그쪽으로 마음을 쓴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잘라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무르게 할지라도 너와 무슨 상관이냐?’

그건 나와의 관계이지 네 문제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신경 써야 할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누구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가정 사역을 한다는 꽤 유명한 사모님이 계셨습니다.

남의 가정에 너무 관심을 쏟다 보니 그러면 자녀들은 어떻게 교육시키십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희생양’이라고 대답을 하는데 아멘!하는 신앙 좋은 척하는. 그 사모는 그 자녀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대가를 치르고 계신지 그 다음에는 가정 사역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이들 고민하고 저에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녀 교육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 대답은 당신 할 일만 잘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해야 할 일, 어머니는 어머니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이런 사람이 되어 달라, 저런 사람이 되어 달라 할 것 없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얼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무르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왜 요한하고 비교하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오직 너는 나를 따르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아침 주님의 그 강한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나 잘하세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느냐 그것입니다.  

이 아침에도 주님이 우리들 각자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확실하게 응답하여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유나 2018.07.15 18:21
멀리 베트남에서도 설교 들을수 있어서 좋네요~~^^
마치 교회에서 듣고있는 느낌~!!!ㅎ
이번주도 주님안에서 승리하는 한 주 되시길 기도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