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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담대함 (히브리서 1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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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고가도로가 10일, 화요일부터 공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고가도로가 76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화로 

실베스터 스텔론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록키(Rocky)’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록키는 빈민가의 뒷골목에서 고리대금업자 밑에서 일하던 자입니다. 

때때로 스파링 파트너로 시합이 있을 때마다 푼돈을 얻어 쓰는 삼류 복서입니다. 냄새나는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며 살던 그는 애완동물 가게를 드나들면서 점원인 에이드리안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그러나 애이드리안은 불량기가 있는 록키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독립기념일에 특별 헤비급 타이틀매치가 열리게 됐는데 

도전자가 사고가 나는 바람에 무명인 로키가 도전자로 지명이 됩니다.

이 경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하나마나한 경기입니다. 

그런데 록키는 이번 기회가 에이드리안에게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성실한 남자임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시합을 앞두고 록키는 피나는 연습을 합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챔피언 밸트가 아니라 에이드리안의 사랑을 받는 일입니다. 

자신이 패하는 것은 뻔한 일이지만 뛰어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시합 당일 록키는 의외로 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수 없이 펀치를 맞고도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15회까지 경기를 견딥니다. 드디어 심판의 판정 소리가 나고 챔피언의 손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록키에게는 판정 소리는 관심 밖입니다. 다만 에이드리안만 미친 듯이 부릅니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우리들도 신앙 생활하면서 예수만 보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에 집중하는 것이 인생 승리의 비결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회퍼의 유명한 신학명제는 

“값싼 은혜가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유혹이다.” 

흔히들 복을 달라고 비는데 그 속에 예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복만 빕니다. 기복신앙. 

예수님께서는 이미 복된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복된 길을 다 가르쳐주셨거늘 다 마다한 채 손바닥 내놓고 무작정 복주십사, 몸부림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우리들의 복이 아니라 초점이 십자가에 맞추어져 계십니다. 

마태복음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에 생명의 길이 있다,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훈련과정을 무시한 은혜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도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때 훌쩍 책장을 넘기듯이 하루아침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십 년이라고 하는 긴 훈련 코스, 이 과정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인격도 전기 스위치를 건드리면 반짝하고 불이 들어오듯이, 컴퓨터를 클릭하면 금새 눈앞에 화면이 뜨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훌륭한 인격으로 키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진리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훈련과정, 시련의 시간, 이것들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복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공부에도 지름길은 없습니다. 빨리 빨리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깨닫고 또 깨닫고. 

그래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궁뎅이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23절을 보면 의미심장한 질문이 있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여기서 ‘힘쓰라’는 말은 ‘죽을힘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권투시합이나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 선수와 싸울 때 죽을힘을 

다해 싸울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구원의 문,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문제들과 죽을힘을 다해 싸우라는 뜻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저에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해야 잘 삽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다 저 할 탓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여기 있는데 이것은 하지 않고 그냥 쉽게 가려고 해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중도에 하차합니다. 

사람마다 건강을 위하여 집에 운동기구 하나 정도씩은 마련해 놓습니다. 

그런데 그것들로 며칠이나 운동하였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운동기구가 있다고 건강해 집니까? 아니올시다.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제가 운동을 열심히 할 때 아무 운동 기구도 없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기구가 필요 없습니다. 내가 하겠다는 의지, 결단이 중요한 것입니다. 

운동은 나 스스로가 하여야 내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봉사하고 내가 헌신해서 그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하고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하십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조용히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여러분,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존경받는 분들, 하나같이 한평생 외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휘청휘청하고 넓게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좁게 산 사람들입니다. 

먹을 수 있다고 다 먹고, 잘 수 있다고 다 자고,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넓은 세상이지마는 내가 선택해야 될 것은 좁은 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넓은 세상을 좁게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좁혀 가면서 살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 로마의 박해와 유대교의 교리적 공격으로 위축되어 있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 잘 견뎌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박해와 고난이 지나갔을 때 그들 가운데 의심하는 자가 생기고, 배교자가 생기고, 주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향해서 오늘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32-3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32절의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이 빛이라는 것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난의 큰 싸움” 그 당시 예수를 믿으니까 비방거리가 되고, 환란을 당하고 구경거리, 조롱거리가 됩니다. 또 예수를 믿음으로 많은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특권도, 재물도, 명예도 빼앗겼습니다. 

34절에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이라고 한 걸 보니

그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더 낫고 영구한 삶이 있는줄 앎이라” 지금 현재보다 더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박해를 당해도 재산을 몰수당해도 기쁘게 감당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참아오고 인내한 그들 중, 안타깝게도 한 두 사람 배교자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영적으로 뒷걸음질치는 그들에게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인생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담대함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35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신앙생활의 회의가 때로 우리를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기는 계신가, 내가 정말 옳은 생활을 하고 있는가, 정말 예수님이 복을 주시기는 하는가’ 이런 유혹이 찾아올 때 믿음의 담대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어렵고 불안한 시기를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의 확신, 담대함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흔들리고, 직장, 사업이 흔들려도 이 믿음의 토대만은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다른 것은 다 허물어져도 우리가 믿음의 토대위에 굳건히 서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재개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참된 믿음으로 영광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합니다. 

36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며, 

인내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는데 참지 못해서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될 텐데 말입니다. 

여러분, 힘겹지만 인내해야 합니다. 견뎌내셔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석수장이가 대리석을 깰 때에는 한 번 내리치고 두 번 내리치고, 열번, 스무 번,쉰 번 목표를 정하고 내리칩니다. 백 번을 칠 때까지도 깨지지 않았지만 그 치는 동안 힘이 축적되어 있다가 마지막 한번을 내리칠 때에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를 정하고, 낙심치 아니하고, 물러서지 아니하고 전진하면 어느 땐가는 그 목표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 주님이 믿고 앞으로 나오는 자를 홀로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를 세운 선한 일에 대해서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맙시다. 

때가 되면 반드시 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믿음으로 영광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뒤로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38절, 39절 말씀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후퇴란 없습니다. 왜 뒤로 물러서면 안될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곧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시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뒷걸음질 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광야 40년을 지나오면서 뒷걸음질 치는 사람들 중 살아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움이 오면 “돌아가자! 돌아가자! 종살이가 더 좋았다!”고 모세에게 거역하고 선동했던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지 않았습니까?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할 때 롯의 아내가 롯의 손길을 붙들고 그 성을 빠져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롯의 아내는 미련을 가지고 뒤돌아보고가 그만 소금기둥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뒤돌아보는 것, 뒷걸음질 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그 이유!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에 뒷걸음질 치면 안됩니다. 

신앙은 전진 아니면 후퇴입니다. 정지 상태는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전진하고 계십니까? 만일 아니라면 후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담대함을 가진 자들만이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으며, 지금 나를 둘러 싸고 있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인내함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자만이 영원하신 그 나라에 기쁘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만 바라보며 주님 가르쳐준 가르침대로 행함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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