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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행하시는 구원 (출애굽기 1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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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모인 우리 가운데서 불안을 느끼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한 것 같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점에서 불안과 두려움이란 연약한 우리가 평생 함께 걸어가야 할 반갑지 않은 길동무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불안과 염려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 둘, 전도와 치유.  

지난 주일 설교하는 중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로 노방전도. 

그런데 예배 후 몇 분이 전도에 관한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화요일 새벽예배 중에 도산공원으로 오후 2, 3시

또 어떻게 전도해야 하느냐? 목사님들과 의논, 4영리로는 전도 못함.

국민일보에 3/17(토) 은평구 구산동에 위치한 서울세움교회에서 10-4

파워 오이코스 관계전도 세미나. 참석하실 분들이 있으면 저도 참석.

오늘 셀리더들은 저에게 참석하실 분들 꼭 알려 주셔야.

 

제 마음의 소망, 소원, 신유의 은사

김영수 성도님과 전경민 성도님이 앞으로 해 나가겠지만

마침 캐나다 토론토에 계시는 김석재 목사님이 4월 8일이 시간이 비신다.

신유, 치유 집회. 김석재 목사님이 작년 10월 저의 집사람이 학회에 갔다가 

이은하 자매님이 출석하는 교회 담임 목사님, 가서 안수기도를 받고 무릎

4/8 11-1시까지 식사는 그 후에, 주변에 아픈 분들 모두 초청해서.

 

신앙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라야. 

전도는 하나님의 음성이 교회가 전도를 해야 교인들이 잘 산다.

신유는 아픈 분들이 고쳐 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였습니다. 그것도 430년입니다. 

할아버지도 노예, 아버지도 노예, 나도 노예, 내 아들도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히브리 노예들이 드디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출애굽기를 헬라어로 엑소더스라고 하는데 탈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지긋 지긋한 노예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이제 자유의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 땅을 벗어나자마자 이들 앞에 상상도 못한 홍해가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사들.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가는 길임에도 가로막는 일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은혜 받아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는데 꼭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잘 살아갈텐데 세상이 나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이럴 때 나타나는 반응이 크게 두 가지인데, 왜?와 어떻게?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신앙인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은 ‘왜’ 라는 물음표입니다. 

‘왜’ 라는 질문은 생활에 있어서는 유익한 면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왜’라는 질문을 할 때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질문일 때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왜 내가 참아야 합니까? 왜 내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합니까’ 

성경에서 부정적인 ‘왜’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아마 요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곧 멸망하게 된다고 전하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그러한 명령이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고 있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시대에 동경. 

요나는 도리어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니 요나는 싫은 것입니다. 

요나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왜’를 외치며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에서 ‘왜 물이 없느냐? 왜 야채와 고기가 없느냐?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나와 고생을 시키느냐?’고 시작부터 끝까지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노래하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사건 사건 속에서 ‘왜’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질문을 던지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가운데 그 불평과 원망이 생활의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외에는 

광야에서 죽고 맙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의 표현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머무는 가정, 그런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는 절대로 하나님의 생명력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라는 물음표의 신앙에 익숙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지 않으시고, 또한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왜’라는 물음표 신앙의 사람들의 대체적으로 보면 사안마다 ‘안 된다. 못 한다.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헌신하는 일에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은 쉬지 않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말하며 끝없이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댑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신앙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다른 사람들까지도 부정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며 축복하시는 사람들은 ‘어떻게’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개하게 해야 하는데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고 말씀하시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사야는‘ 하나님, 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뒷걸음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이사야의 응답은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입니다. 

‘어떻게’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된다.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잘합니다. 

헌신해야 하는 일 앞에서 입으로 말하는 것 보다 손과 발로 헌신하며 섬깁니다. 헌신하지 못하는 핑계를 말하기보다 해야 할 이유를 먼저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사와 기쁨이 삶을 지배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아 저렇게까지 섬기는 것이구나’하는 섬김의 감동을 줍니다. 

 

우리 신앙의 삶은 어떻습니까? ‘왜’가 많습니까? ‘어떻게’가 많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아니면 바로 군대의 칼에 찔려서 죽는 것 밖에는 살아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위기 앞에서 모세에게 달려가서 항변합니다. 

애굽에 공동묘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죽게 하느냐?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다고 원망합니다.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환경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두려움은 범죄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두려워 집니다. 

 

다음은 모세의 반응입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망하고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전쟁에서는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아니면 살기 위해서 도망을 쳐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느냐,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환경만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는 바다요, 뒤에는 군대라고 한다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립니다. 

본문의 모세가 그랬습니다. 사방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방이 꽉 막혔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위를 바라보아야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할 때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모세는 손에 든 지팡이로 홍해를 쳤습니다. 

그러나 이 지팡이는 보잘 것 없는 마른 막대기입니다. 

그 당시에 모세의 지팡이 외에도 수많은 지팡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인 모세가 든 이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마른 막대기와 같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내 앞을 가로막는 홍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시간 믿음의 지팡이를 높이 드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의 지팡이로 여러분 앞에 있는 홍해를 내리치십시오. 

어떤 고난과 좌절 속에서도 하나님만 붙들고 나가면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홍해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산 증인들 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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