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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무화과나무 (마태복음 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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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ain, no gain. 만고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희생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학생들은 놀고 싶은, 게임하고 싶은 것을 희생해서(포기) 공부를 합니다.  

성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희생해서 생활을 책임져야 합니다. 투자. 

희생, 투자 없이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하는 마음을 도둑놈 심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목회를 하면서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투자 중에 가장 좋은 투자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를 보면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선한 일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때로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best, second level의 삶

그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부자 청년은 많은 재물 때문에 그냥 돌아갑니다.

재물만이 아닙니다. 오늘은 사업상 꼭 만나야 할 사람, 빠지면 안될 학원.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다가 시장하시어 무화과 나무를 보고 열매를 먹으려고 갔지만 아무런 열매도 없는 것을 보시고는 저주를 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19절 말씀을 보세요. “길 가에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주님의 저주로, 그 자리에서 그 무화과 나무는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보게 되면, 어떤 면에서는, 좀 너무하신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이 이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 예가 두 군데 나옵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번의 모습을 이 마태복음 21장에서 다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건은 12절 이하에 나타난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은 공생애 말기, 고난 주간 중 월요일에 행해진 사건입니다. 

시대마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가치체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두 가지 정신적 가치체계는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기둥은 모세오경으로 대표되는 율법과 성전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삶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삶의 원리가 모두 율법으로부터 나왔습니다. 613가지.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집입니다.

성경에는 세 개의 성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 포로 귀환 후의 스룹바벨 성전,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

성전은 천막으로 지었든지, 아니면 돌이나 황금으로 지었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지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느냐 아니 계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요, 속죄 받는 장소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먼 곳에 가 있어도 일 년에 한 차례 이상은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전이, 장사치들이 모이는 시장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소를 팔고, 양을 팔고, 비둘기를 팔고, 또 이런 거래를 하기 위해 환전을 하는 등, 성전에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흠없고 정결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오는 자들이 그런 짐승을 가져 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하여 성전에서 짐승을 팔고 사게 되었습니다. 

또한 만 20세 이상의 유대 남자들은 반세겔의 성전세를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를 위하여 로마나 헬라의 화폐를 세겔로 환전해 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선의의 목적에서 비롯된 관행이 점차 부패하고 말았는데, 

제사장들이 특혜를 주어서 특정 장사치들에게만 허락해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바친 제물들을 다시 파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행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행하여지던 것들이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려, 

경제적 이윤 추구가 주된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묻고 또 물어야만 합니다.

나는 지금 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매일 이런 질문이 없다면 스스로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특정 교회를 지정해서 죄송하기는한데 남대문 신세계 백화점 옆에 가면 

그 유명한 상동교회가 있습니다. 1988년 스크랜턴 선교사가 초대 담임목사

이준 열사 헤이그 파견,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소 개설.  

1-4층은 새로나 백화점.

교회에서 임대 사업을 하면서 교회로서의 영향력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중앙극장 앞의 남대문 세무서. 임대.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에 대해서, 공동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해야만 합니다. 

 

이때 주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진노하셨다는 겁니다. 

환전상을 둘러엎으시고, 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다 쫒아내셨습니다. 평소의 주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온유하시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으로 비춰졌는데, 성전에서 보여 준 주님의 모습은, 이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처럼 성전에서 진노하셨던 것입니까? 

성전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렸고,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명 디자이너들 의상 바자회. 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유지되는 곳. 

그런 면에서 목회자는 사례비로 살아야. 자비량 반대. 

여러분들이 저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진노하셨던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입니다. 주님이 시장하셔서 그 나무에게 열매를 구했지만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열매가 없을 때,그 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말라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두 가지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두 가지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왜이겠습니까? 여러분 이 두 사건은, 따로 구분되어진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어떤 의도 속에, 서로 맞물려져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사건을 동시에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우리 또한 주님으로부터 이런 진노하심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여러분, 이 두 가지의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살펴본 이 두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워주신 새하늘 교회를, 우리가 힘써 전도하고 채워서, 그야말로 만민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들어야 함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서, 하나님이 세워 주신 이 성전을 채워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자람이다.” 진정 신앙이 살아있고, 믿음이 살아있다면, 분명 그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 증거는 생명의 열매들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인원이 계속해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 공동체가 잠자는 공동체 내지는, 죽어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5/28 서정훈이 마지막. 

 

오늘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교회는, 반드시 성도들이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과 주님이 말씀하신 기도에 대한 교훈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축복에 대한 열쇠가, 바로 이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가 곧 모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복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기도가 아니지요? 어떤 기도입니까? 믿음의 기도입니다.  

누구를 믿는 믿음입니까? 주를 믿는 믿음입니다. 

주를 믿되, 확실히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기도,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예루살렘 교회와사도들의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회당 문에 서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결국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아니한 채로 무너지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인생도 결국 그와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섬겼던 제자들이나 사도들의 기도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고, 또 골방에서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과의 교통함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랄 것도 없이 무조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온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정말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역사들이 나타났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실제로 가능하게 나타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질병이 나았습니다.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며,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다 기도로 해결되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예루살렘 초대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기도의 응답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능력의 시작은 기도입니다. 

다니엘 9:23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힘써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전도를 통해 이 새하늘 교회 아름다운 성전이 

채워지고 삶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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