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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깨끗하게 (디모데후서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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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목요일은 제 99주년 삼일절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삼일절에 관한 설교를 해 드려야 하는데 지난 주간 내내 잘 준비가 되지 않아서 오늘 부득이하게 ‘자기를 깨끗하게’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된 점 양해 바랍니다. 

 

때때로 사회에서 교회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교회에 대해서 이런 잘못된 평가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증언하지 않습니다. 

한국기독교는 역사의식과 애국심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하여 왔습니다. 

33인중 불교가 2인, 기독교가 16인, 천도교가 15인 

그 대표적 예가 바로 1919년 3.1운동입니다. 

지금으로부터 99년 전 1919년 3월 1일은 자주 독립을 외치며 우리 조선 

민족이 모두 궐기했던 날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애국과 신앙을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나만 잘되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산 안창호선생님이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찰서 10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1개를 세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교회는 이 사회의 정신적 지주인 것입니다. 

이 민족이 복 받는 길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민족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이유는 예배당 좌석이 비어서 이것을 채우려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증거 하지 않을 때 그건 이미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UNICEF에서 일하는 어떤 노처녀가 길을 가다가 마법의 램프를 주워서 

문질렀더니 지니가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란 여자가 자기가 원하는 세 가지 소원을 말하려고 했더니 지니가 하는 말이 “이제 제가 나이가 좀 들어서 딱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말해보세요.” 

여자는 약간 고민하다가 말했습니다. “저는요, IS문제가 잘 해결되어서 시리아 뿐만 아니라 온 중동 지역에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지니는 중동 지역의 지도를 한참 바라보더니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여기 이 나라들은 장장 수천 년 동안 서로 피 튀기게 전쟁을 해온 나라들입니다. 제가 램프 속에 갇혀 있은 지가 500년이 넘어서 자신이 없네요. 실현 가능한 개인적인 소원을 말해주세요.”

이 여자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만 다른 소원을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저에게 꼭 맞는 신랑감을 찾으려 했으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런 남자가 있으면 만나게 해주세요. 사려가 깊으면서도 유머 감각이 넘치고, 요리 잘하고, 집안 청소와 세탁까지 잘하는 남자, 더 나아가 친정 식구들에게도 잘해주고, 휴일에는 집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TV 보지 않고 저를 재미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그런 남자 좀 찾아주세요!” 

그러자 지니는 한숨을 깊이 쉬더니만 “좀 어렵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중동 

지역의 평화를 이루어 드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네요”

이 세상에 청춘남녀들이 그렇게도 많은데 막상 결혼 상대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직장에서 일꾼을 뽑으려고 해도 지원자는 많은데 적절한 사람을 뽑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일꾼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모세나 여호수아처럼,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바울이나 디모데처럼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들 중에도 금과 같은 사람과 은과 같은 사람 그리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아마 금그릇과 은그릇 같은 사람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금그릇과 은그릇과 나무그릇과 질그릇을 다 쓰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금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은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기죽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사람들 중에는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27, 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ㅇ르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물줄기를 바꾸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나무 그릇과 질 그릇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합니다. 

‘금이냐? 은이냐? 나무냐?’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와 같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 쓰임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주를 위하여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을 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하다는 것은 인생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고 세상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죄의 뿌리가 욕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은 하니님을 위하여 쓰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입니다. 

욕심은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여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묶인 것들이 풀리고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스스로 다루어야 할 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우리들 마음에 들어가면 일어나는 현상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무슨 은혜를 주셨는지 모두를 잊어버리는 영적 치매 현상에 걸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양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자기 욕심을 버릴 때부터 가능합니다. 

인생은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됩니다. 

저는 그래서 주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은  흠 없고 온전한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어려움들이 풀려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주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먼저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일조는 참으로 쉽지 않은 몫입니다. 십일조는 재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 1440분의 1/10은 144분 2시간 24분. 

그러나 그 쉽지 않은 일을 통하여 우리는 주를 위하여 쓰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 3:10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서 "나를 시험하여"라고 하는 것은 "나를 체험하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실천할 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하는 신비스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 없이는 신앙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통해 신비스런 체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보시는 중심의 두 번째는 깨끗함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도 아니요 은 그릇도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정말로 귀히 여기시는 것은 깨끗함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합니다. 

요한일서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 온 여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나이든 장로부터 어린 사람들까지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고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용서로 끝내지 않고 죄로부터의 분리를 요청하셨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성도는 용서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어두움을 떠나서 죄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은과 금은 많아졌지만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깨끗한 그릇으로 살아가기는 점점 힘든 세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가 문화가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죄가 문화가 된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끗하면 오히려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 안 짓고 어떻게 살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둔감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는 죄 짓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고 별로 불편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보편화된 죄의 문화에 익숙해져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하고 세상을 따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를 짓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피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죄에 대하여 얼마나 대항하고 계십니까?

사도바울은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괴로워하였습니다. 로마서 7:25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들 형통한 삶을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을 묶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진정으로 풀려나 형통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정말 원하십니까? 

그 해답은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시면 됩니다. 

주가 쓰시겠다하시면 인생의 모든 묶인 것들이 풀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싸워야 합니다. 

자신과 싸워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재물만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 자신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쓸 수 있을 때까지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신 깨끗한 그릇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이 그를 묶어 놓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저는 여기 모인 우리 새하늘 교회 교인들이 모두 하늘나라를 침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천국과 축복을 쟁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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