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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다! (사도행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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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남의 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교인으로부터 수긍하기 어려운 요청을 받았습니다. “가족과도 같은 애완견이 죽었는데 장례예배 집례를 해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습니다. 그 담임목사는 완곡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장례예배가 영혼을 주님 품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동물을 위한 장례예배는 신학적으로도 복잡한 논란이 있다며 거절하였습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옷을 잘 차려 입은 할머니 한 분이 슬픈 얼굴을 하고는 교회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제가 가족처럼 기르던 개가 있는데 그 죽은 메리를 위해서 장례식을 부탁드립니다. 목사님이 개 장례식은 안합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요, 내가 먼저 죽을 경우를 생각해서 메리한테 미리 보험을 들어 놓은 것이 있거든요, 이 보험금을 탔는데 십만불입니다.

장례식 집례 해 주시는 분한테 그 십만불을 사례금으로 드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길 건너편 성당의 신부님한테 부탁드려야 하겠네요.

아이고, 할머니, 진작 메리가 개신교 신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기본이 약하면 주변 상황과 환경에 따라 쉽게 무너집니다. 내외부적으로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와도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서서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기초, 기본이 튼튼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의 말씀을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는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의 기초와 기본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성령의 역사와 섭리를 매우 강조하였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웁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초대 교회를 탄생시키고 확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이런 성령 역사의 최초의 사건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 강림 사건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비린내나 풍기던 어부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마게도냐의 알렉산더도, 로마의 시저도, 중국의 진시황도 하지 못했던 죽음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교회시대, 성령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죽음이 무서워 두려워 떨던 갈릴리 촌부들이 방문을 걷어차고 나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담대하게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예수 앞에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300년이 채 흐르기도 전에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가 그 앞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갈릴리 촌부들을 이토록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이 임하자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한 번 변화되는 것도 어렵지만 그 변화를 지켜나가는 것도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말씀이 느헤미야서입니다.  

느헤미야서는 총 13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힘과 정성을 다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장면이 나오고, 12장에는 학수고대하던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3장을 보면 느헤미야가 잠시 페르시아로 돌아가 있는 동안에 또 다시 백성들이 범죄에 빠지게 되자 느헤미야가 다시 귀환하여 다시 한 번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중심에는 신앙 생활의 기본인 안식일 준수 촉구 및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한 사실이 있습니다. 솔로몬. 

느헤미야 10:30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13:26, 27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성령 충만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 녹녹치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고 

자기 얄팍한 이성과 경험 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인의 Power가 있습니다. 소위 성령의 능력입니다. 

한 할머니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한 처녀가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권능으로 가정과 교회를 친히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보기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18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고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루는 놀라운 연합의 신비를 아담이 경험하도록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실낙원하게 되었습니다. 낙원에서 쫓겨난 우리 인생들을 낙원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했지만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고민이 시작되었고 그 해결은 내가 직접 내려가겠다.

성육신, incarnation.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죄를 대속해 버리시고 그리고 기도하는 120문도들에게 성령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교회라는 공동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참다운 교회 공동체가 탄생하던 순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에 나타납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모이는 곳에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모일 때 주님은 일하십니다. 

모임을 등한히 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살펴보십시오. 신앙이 살아있을 때 열심히 모입니다. 

모이는게 싫어졌다면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겁니다.

 

에스라 부흥운동도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께서도 마가의 다락방에 120문도가 모여서 기도할 때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잡히면 죽을 줄 알고도 모임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주석가 바클레이는 “그들은 모두 한 몸, 

한 마음이 되어 한 곳에 있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공간적으로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몸도 마음도 죽고 사는 문제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소위 생명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모임은 세상 친목회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시간보다 우선할 값어치가 있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언어가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 중엔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온유한 사람과 괴팍한 사람, 믿음이 큰 사람과 적은 사람, 심지어 가족 따라 끌려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곳은 이미 은혜의 공동체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타는 장작불 속엔 생나무를 넣어도 잘 타듯이 은혜의 자리엔 믿음이 

약한 사람이 함께 있어도 쉽게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저는 2018년엔 우리 새하늘 교회에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본문 2절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로 쓰여집니다. 

바람이 불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바람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나 우리가 다 느낄 수는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바람 같은 소리가 급하고 강하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산골짜기에서 급류가 흘러 내리듯이 급하게 임했습니다. 이 성령의 바람은 급기야 이 한국 땅에서도 단 100년 만에 도시와 농촌, 산과 바닷가에 십자가의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3절에 의하면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분명히 보였다고 말합니다.불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 속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갈멜산 엘리야의 제단에는 하나님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눈을 열어 보게 하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눈이 열려야 교회의 비전이 보이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보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청년의 환상이 보였고, 

성령을 받아 눈이 열려지고 나면 지금까지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성령충만의 결과는 - 한 마디로 ‘말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대화가 시작되고 교제가 이루어지고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부부간에도 일생을 살아가지만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유식하고 한 사람은 무식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부모들의 문제가 자녀들과 말이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요 사랑의 문제입니다. 부모 자녀간에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집은 부모가 한국말을 하고 자녀들은 영어를 쓰는데도 문제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경이 깨달아 지고 예수님 부활이 내 부활이 됩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오신 사건은 모여서 기도할 때 임했습니다.

교회생활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아시겠습니까? 

우리교회의 셀모임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그런 모임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셀모임을 서로 위해 기도하고 서로 찾아보고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십시오.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사랑이 통하는 신앙 공동체의 경험!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옵니다.

험한 세상을 승리하는 능력이 거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2018년엔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 변화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오직 성령님이 임하여지만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성령 강림함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각자들의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의 증인되는 삶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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