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브엘세바! (창세기 26:23-25)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StartFragment-->신약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울 서신입니다. 바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각 교회에 쓴 편지, 목회서신인데 모두 13권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13권 중에 압도적으로 긴 것은 고린도 전, 후서입니다. 전서가 16장, 후서가 13장 총 29장입니다. 

왜 그렇게 기냐하면 바울 사도의 말이 제일 안 통했기 때문입니다. 

항구 도시라서 물질이 풍부, 보리 고개란 말을 잘 모른답니다. 우리 나라도 여수, 통영 참 잘 삽니다. 통영 굴, 미국 사람들 수시로 수질검사

하나님의 은혜로 은사가 많이 나타나, 그러다 보니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 철학도 발달되어 있어. 그러다 보니까 사도 바울의 말이 잘 통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도 이야기 하고 저렇게도 이야기 해도 그렇습니다. 아무튼 지금도 전도하기 힘든 사람들, 좀 배웠다는 사람들, 

좀 가지고 있는 사람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반대로 형통한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짧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4명의 족장들이 등장하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런데 이삭의 이야기가 가장 짧아요. 짧다는 것은 순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삭과 같은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복 받은 사람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복받을만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어느 날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네 아들 이삭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그것까지 순종했습니다. (순종)

그래서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또 야곱을 봅시다. 야곱은 너무 너무 복을 사모했던 인물입니다. (치열함)

어느 정도로 복을 사모했느냐 하면 형의 급한 성질을 이용해서 형의 장자권을 가로챘고, 병든 아버지를 속여서 아버지의 축복권을 가로챌 정도로 복을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에 대한 사모함, 복에 대한 열정만큼은 우리가 인정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모함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 특히 어머니 리브가를 떠나 외가집이 있는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 20년을 살아가게 됩니다.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도 야곱은 천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나는 당신을 놓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고백입니다. 환도 뼈가 부러지면서까지 복 받기를 원했던 인물이 야곱입니다. 그는 충분히 복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요셉 또한 그렇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사랑받던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지만,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다 용서하고 형들을 맞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 성품이 의롭고 정결하고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셉을 가리켜서 예수님의 성품에 비교하곤 하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요셉은 복받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노예로 끌려갔지만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후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은 뭔가 복받을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특별히 그렇게 매력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삭이 한 일이라곤 우물을 열심히 판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도 열심히 파서 샘이 터지면 남들이 와서 또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 그것을 내주고 다른 데에 가서 또 우물을 팝니다. 

그게 그가 일생에 한 일입니다. 이삭은 바로 온유한 자의 삶이 어떠한 것을 보여주는 신앙적 인물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삭은 전쟁보다도 평화를 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더 넓은 우물과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온유한 자의 것입니다.  

이삭은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양보하는 생활을 하였고,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의 영적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절을 보면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길을 재촉하다가 그랄이라는 지역, 블레셋 땅에 잠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2, 3절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러면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이 그랄 땅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이 그랄이란 동네가 그리 좋은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예쁜 여인이 있으면 그 여인을 빼앗기 위해서 그 남편을 죽일 정도로 아주 포악한 동네였습니다. 이삭은 두려웠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미인이었기 때문에 이삭은 자기 아내에 대해서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참 부끄러운 믿음의 조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실수는 이미 아브라함도 행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 흉년을 당해서 애굽에 내려갔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면서 바로를 속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장에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또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들 이삭이 그 일을 또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정말 가장 좋은 교육이란 무엇입니까? 부모가 몸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부모는 도둑질을 하면서 “야! 너는 절대로 도둑질 하면 안 된다.” 아무리 타일러도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간디의 예화.

부모들이 자녀에게 보여 줄 가장 좋은 모범은 성경 열심히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안에도 어떤 내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질병은 유전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나쁜 습관들은 그 자녀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이 저지른 실수가 이삭에게도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잘못된 악순환을 끊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고리는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289장 2절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12절을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증언입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던 해에. 26:1절에서 말하는 바로 그 해, 흉년이 든 해를 말합니다. 흉년이 들었던 해! 아무도 농사지을 엄두도 못 낸 그 해에 이삭은 농사해서 대풍을 맞았습니다. 100배나 얻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면, 흉년은 장애물이 되지 못합니다. . 

흉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환경이 방해를 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그리고 이삭이 거부된 사실 속에 한 가지 눈여겨 볼 말씀이 있습니다.

13절에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침내는 그냥이 아니라, 쉽게가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를 하다가 안 되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다가 마침내 이루었다 그 말입니다. 신명기 8:16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삭이 가지고 있는 양과 소에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그 떼가 심히 많아졌습니다. 노복이 심히 많아졌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회사를 운영하는데 회사가 발전해서 그 회사의 직원들이 엄청나게 많아진 겁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일들에 이렇게 양과 소 떼가 많아지는, 노복이 많아지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삭이 그랄 땅에서 거부가 되니 그 땅 사람들이 시기를 하는데 우물물을 흙으로 막고는 여기서 떠나라고 합니다. 

성경은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환경적 조건에는 금보다 물이 더 우선적이고 근본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는 물에 관한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40년 광야생활만 하더라도 마라 사건, 르비딤 사건, 므리바 사건 다 물 사건입니다.

오늘 거부가 된 이삭에게도 바로 우물 사건이 터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삭이 거부가 되었다는 것도 아니요,

우물을 양보하였더니 더 넒은 우물을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핵심은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은 부자도 되었고 넓은 우물도 확보했습니다만 그보다 더욱 절실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이삭은 지금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브엘세바는 이삭이 어릴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장막을 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이삭이 결혼할 때까지 신앙적으로 양육 받은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거부가 되는 것이고 더 넓은 곳에서 평탄한 삶 사는 것입니다만 이삭의 관심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과연 복받을 만합니다. 

25절에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단을 쌓았다는 것은 어디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여호와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 우선의 신앙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제일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돈 버는 것도 좋고 장소 넓히는 것도 좋지만 예배가 우선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가 가장 중요.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바른 기도생활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그 사람의 기도생활과 비례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반드시 

기도생활로 이어지고 기도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다니엘 9:23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25절에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했는데    

앞에 우물을 팠다라는 말은 ‘하파르’라 해서 땅을 탐지하며 힘들어 팠다라는 말이고 브엘세바에서 종들이 우물을 팠다는 것은 ‘카라’라 해서 단순히 파기만 했다는 뜻입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물을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삭이 브엘세바에 올라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니 우물을 절로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이삭에게 사람과의 회복도 이루어집니다. 

26-31절 이삭을 시기하여 그랄 땅에서부터 몰아내었던 블레셋 사람들이 화친하고자 찾아옵니다. 28절 그들은 이삭이 하나님이 함께 함을 본 것입니다. 

우리들은 크리스찬입니다. 우리들에게서 하나님이 함께 함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의 승리는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물과 부는 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 창조 전에 하나님이 생각하시다가 택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부자 되는 것보다, 평안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부자 되는 문제 보다, 은혜 받는 일이 내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성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복을 받으실 때까지 은혜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브엘세바에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이삭과 같이 

우리도 내 마음의 고향인 이 새하늘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StartFragment-->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