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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자의 용기 (로마서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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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00번 째 맞이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그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 즉 예수교는 크게 세 분파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로마 가톨릭 교회입니다. 그리고 5세기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지면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가 갈라져 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개신교는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다시 

로마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종교적인 타락,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하겠다’고 하는 영웅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한 겁많은,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 수도사의 깊은 고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깊은 고뇌 끝에 참복음의 진리를 로마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 것이 그 시발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시작이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로마의 핍박으로 흩어져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흩어진 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사적으로는 교회들이 성장을 하여 힘을 얻어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의 대표인 로마 교황이 국가의 대표인 국왕보다 더 높은 실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핍박은 사라지고, 편안하게 되자 교회는 점점 타락하고 부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패한 교회는 진리를 떠나게 되어 세속적으로 흘러갔습니다.

 

중세 유럽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종교집단이었습니다. 

그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순전한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미신과 신비주의가 혼합된 정체불명의 종교생활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세속권력과 손잡고 종교권력을 마음껏 휘둘렀으며, 공공연히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팔고, 자식들에게 대를 이어 그 자리와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교회 세습. 

그 시대 교인들이 미신적인 신앙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은 사제들만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전유물이었고 일반 성도들은 사제들이 읽어주는 성경구절과 기도문을 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도 해석할 수도 없었던 일반 민중들은 화려한 성당건물과 그 안에 그려놓은 각종 성화와 조각상들만이 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개혁자들이 예배당에 모셔놓은 성화들이나 성상들을 파괴했던 것은 그런 미신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외친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로마 카톨릭을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바로 서자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 개혁입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은 1,000년 이상을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엄청나게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영적인 나병환자와 같았습니다. 

나병이 무서운 것은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코가 썩어서 떨어져나가도 아픈 줄 모릅니다. 손을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 줄을 모르는 게 나병입니다. 나병이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교회가 그랬습니다. 

면죄부를 팔면서도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급기야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던 중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에서 면제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내 부모나 형제가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 ‘연옥’이라고 하는 지옥대합실에 가 있는데 그 죽은 사람을 위해서 면죄부를 사면 지옥대합실에서 천당으로 옮겨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연옥은 성경에는 있지도 않습니다. 

능숙한 구변을 갖춘 테첼이란 신부가 외칩니다. 

“똑똑히 들어라. 너희들의 넣는 돈이 이 궤짝에 들어가서 딸랑 소리가 날 때마다 불쌍한 영혼들이 연옥에서부터 해방되어 뛰쳐 나오게 될 것이다.”

그 때 과감하게 ‘그건 아니라’고 외치고 나온 사람이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는 보름스 회의를 소집하고 마르틴 루터를 소환합니다.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가 가면 돌아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피신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때 루터는 말합니다. 

“원수들이 보름스 성당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며 재판정에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합니다. “Oh, God! Here I stand. I have no choice.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의 신앙이며 정신입니다. 

실로 당당한 태도입니다. 그리고는 밀고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585장

 

그리고 개신교가 탄생하였습니다. 

개신교(Protestant)는 ‘반항하는 사람’, ‘저항하는 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벌인 개혁, reformation은 느슨해지고 일그러진 것을 원래의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운동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교파나 교단을 만들 의사로 개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아닙니다. 변질되어 가는 제도나 질서를 본래 이념대로 다시 돌이키기 위한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도 개혁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을 부르짖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개혁이 제도나 시스템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의식이 바뀌지 않았는데 제도와 시스템을 바꾼다고 그 개혁이 완성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개혁의 개(改)자에는 자기를 뜻하는 '몸 기(己)' 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남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고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은 나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가정이 변하고, 내가 변해야 교회가 변하고,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의 신앙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자신의 의식, 가치관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농부들은 씨뿌리기 전에 논밭을 갈아 엎습니다. 

그래야 묵은 땅이 서로 섞이게 되어 농작물들이 잘되는 것입니다. 

굳어버린 논과 밭을 그냥 두고 씨를 뿌려 보십시오. 곡식들이 제대로 자라겠습니까?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속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 이거 기억하시죠? 사실 낮에 좀 오셨으면.

두 번, 한 번은 가스안전점검, 한 번은 몸을 꽈요.

교회 대표기도와 봉헌 순서. 봉사하기로 약속한 것.  

 

몇 십 년 전에 비한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확실히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나아진 것이 틀림없고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두루 나아진 것은 사실인데, 행복이 없고 용기가 없습니다. 우리 한번 개인적으로 솔직히 진단을 해 봅시다. 

또 우리는 확실히 용기가 없습니다. 

옛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용기가 있고 자신이 있었습니다. 확신이 있고 고집이 있었습니다. 남의 삶이 아닌 자기의 삶을 외골수로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자신이 없습니다. 

모두들 확신 없는 시대를 애매모호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러니 비겁하고 나약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백 년 전 95개 조의 반박문을 내걸고 고독하게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나서던 마르틴 루터의 그 위대한 용기가 자꾸만 우러러 보입니다. 

세상에는 말 잘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은 잘하고 글은 잘 쓰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비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글은 어디까지나 공염불에 그치고 맙니다. 

 

본문은 개혁자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의 근거가, 신령한 용기가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네 가지의 질문이 거기에 있습니다.

31절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3절 “누가 고발하리요?”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네 가지 질문에 담대하게 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하나님이 내 편인데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하리요?

확실한 용기입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물질을 의지하고 명예를 의지하고 사람들의 인기와 지지를 의지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나를 지지해준들 무슨 소용입니까? 다 허무할 따름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밀어 주고 성원해준다 하여도 그것으로 내 마음에 용기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실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때에야 비로소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큰 플랜, 하나님의 그 경륜 속에서 내가 지금 쓰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여기에 내 자격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 있어서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붙들어 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선행을 쌓아가는 율법적 관계가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은 은총적 관계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34절에는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기독론이 있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리고 현재 여기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거기에 참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순교자적인 용기, 이 개혁자적인 용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지금도 개혁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속에서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합니다. 

날마다 잘못된 것은 잘라내고 올바른 신앙을 향하여 끊임없이 개혁되어 가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에 37절 말씀대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우리가 넉넉히 이겼다”고 고백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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