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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신앙 (창세기 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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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를 개척한 이후, 특히 2008년 강남으로 이전한 이후, 작은 교회답지 

않게 참으로 주변의 어려운 분들을 많이들 도왔습니다.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부평, 여성 출소자들을 위한 갱생의 집, 

첫새벽의 집 전기료, 500만원

캄보디아로 떠나기 전날 어느 부부가 찾아와서 천만원을 주십니다. 

불가리아를 돕기 위한 한가위 특별감사헌금으로 14,400,000

그 차가 수명이 다해서 올 봄에 새 차를 저희 교회에서 할부로 사드렸습니다. 그 때 할부 보증금이 490만원인데 210만원을 해 주셔서 280만원 잔금. 

올해는 추석연휴가 열흘이나 됩니다. 

아무튼 한가위감사예베를 10/1에 드립니다. 

 

어떤 여자 분이 남녀는 반대로 만나서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쁜 여자는 못생긴 남자하고 결혼하고, 못생긴 여자는 잘생긴 남자하고 결혼한다. 

그래서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얘들아, 못 생긴 여자는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게 되고, 이쁜 여자는 못생긴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된대. 그래서 참 고민이야. 그 이론에 따르면 나는 분명히 못 생긴 남자와 결혼하게 될 테니 어쩌면 좋니?” 

그 처녀의 말을 듣고 있던 친구들이 기분이 상해 한 마디씩 했습니다. 

“예,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들은 너보다 더 고민이다.” 

 

착각이 우리 인생을 참으로 힘들게 합니다.

착각하면 믿을 것을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할 것을 믿게 됩니다.  

시편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사실입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짐승과 같습니다. 

결국 가장 큰 불행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어야 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왜 무너진지 아십니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마누라도 못 믿고, 남편도 못 믿고, 자식도 못 믿고, 자기 부모도 못 믿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잠재력이 소멸되고 맙니다. 

 

요한복음 6장 69절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믿었더니 그 결과로 알았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고야 제대로 된 지식이 생기는 법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이것은 일평생의 과제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이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쌓여 있는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건초더미에 바늘은 본래부터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고 있을 뿐입니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악은 문명의 진보와 교육을 통해 근절될 수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기, 21세기에 들어와서 사회가 진보했다고 악이 근절되고 제거되었습니까? 문명의 진보는 악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중학생들. 존속살해도 소위 엘리트들. 

그렇습니다. 문명의 발전으로, 경제의 발전으로, 교육으로 세상의 악이 제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우리는 하루에도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어디를 갈까? 누구를 만날까? 무엇을 할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우리 인생이란 계속되는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대에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에 상수라는 아이가 살았다고 합니다.  

상수는 장에 갔다 온 아버지로부터 하얀 고무신 한 켤레를 선물 받았습니다. 난생처음 받아본 새 고무신이 너무 아까웠던 상수는 신지도 않고 손에 들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상수는 개울을 건너다가 그만 그 신발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고무신은 물살을 타고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상수는 고무신을 찾으려고 무작정 개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무신을 따라 갔는지 상수는 결국 길을 잃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졸지에 고아가 된 상수는 온갖 고생을 다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상수는 TV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나와 굵은 눈물을 흘리며 그때 상황을 이야기 했습니다. 

마침 그 시간에 그의 형님이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동생을 알아보고 

연락이 되어 가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얼마 못 사시고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살아계셨지만 치매로 자식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중년이 된 상수는 그 상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 인생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하얀 고무신이 가장 소중한 것으로 알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계곡을 따라, 시냇물을 따라 달려가다가 강가에 나와 보니 이제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있는 하얀 고무신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순례자의 노래.

 

오늘 본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믿음의 가정이 있습니다. 

그 가정은 노아의 가정입니다. 노아의 가정은 특별한 복을 받은 가정입니다. 어떻게 복을 받게 되었을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 비결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노아 당시의 시대 상황은 창세기 6장 11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여기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라고 한 것은 자신의 마음대로 서슴없이 죄를 지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육의 본능대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의 본능을 따라 즐기며 살아볼까? 어떻게 하면 욕망을 따라 신나게 살아볼까?’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한탄하면서 “이 땅을 홍수로 쓸어버리리라.”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을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미리 알려 주십니다.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미리 알려 주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홀로 의롭게 산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것을 감당했습니다. 영혼이 죽어 있던 세상 사람들은 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아 버렸지만, 영혼이 살아 있던 노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썩은 나무는 아무리 커도 물에 떠내려가지만 손가락만한 작은 송사리라 할지라도 생명이 있는 것은 물길을 거슬러 올라 가는 법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몸에 소금기가 배지만, 산 물고기는 바다의 소금기가 몸에 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넘어지는 것, 내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이 그냥 넘어집니다. 왜 그 사람 하체가 부실해서.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시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았던 것은 단지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명령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의 경건은 순종에서 왔습니다. 

참된 믿음은 즉각적인 순종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지체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방주를 짓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순종했습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조선소는 바닷가에 있지 산 속에 있지 않습니다. 

노아는 아라랏산에서 배를 지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120년간 방주를 지었습니다. 

12년 동안이 아니라 120년 동안 방주를 짓게 하셨을까? 

우리가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120년을 오직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한 것입니다. 기도제목이 빨리 응답받기를 원하지만은 어떻게 보면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낭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시간이 걸린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계산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홍수 심판을 겨우 빠져 나온 노아의 가정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를 제단에 드렸다는 겁니다. 예배 드렸다는 겁니다. 

노아의 가족이 홍수 심판을 견디고 나와 자신들을 위해 할 일도 많았을 것이고, 궁금한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전에 살던 집은 어찌 되었을까? 예전에 알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까? 등 관심이 많았을 텐데 이들은 오직 

하나님께 먼저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분주하고 복잡해도 예배가 첫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배에 승리해야 만사에 승리합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잘못만나면 인생이 삐뚤어진 길로 가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잘못된 길로 가다가도 바른 길로 인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만남이라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소개됩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가정생활이 온전하지 못하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세리장인 삭개오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돈만 알던 그가 이제는 베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율법에는 2배로만 갚아주면 되지만 그러나 그는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수건을 쓰지 않으면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다른 사람들이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른 예배를 드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배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예배란 소중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제대로, 잘 드릴 때 우리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올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시면 아멘!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가장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삽니다. 

가정의 가장은 먼저 예수 믿고 신앙 생활 시작하신 분들입니다.  

대 홍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노아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신 것은 가장인 

이 노아의 경건한 신앙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살리고 온 인류를 구원하였던 노아의 순종을 본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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