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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고백 (요한복음 3: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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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중앙교회, 금요철야예배 40명 교인 중 20명 참석.

수요 낮예배에 많이들 참석해야. 홍천에서 오심.

 

시편이 영혼의 책이라고 한다면 잠언은 우리 실생활에 대한 책,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3000년 전, 

17: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22:26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말라”

중학교 들어가니 별의 별 아이들, 보증서서 망했다.

주면 됩니다. 목사에게 말하지 말고,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쁨, 이것이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예수님께 세례를 행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이름 앞에는 세례, 침례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사람들이 우 몰려서 예수님께로 가더라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고자질을 합니다. 

요한으로서는 질투가 날 수 있는 사건인데 오늘 세례 요한은 그것을 잘 극복합니다. mind control,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평안이 없습니까? 

마음이 평안치 않은 것 중의 대부분은 비교의식, 질투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격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고, 병들게 하고, 처참하게 만드는 것은 비교의식으로 인한 질투입니다. 이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아주 추해집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야바가 누구입니까? 대제사장 즉 종교지도자입니다.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당대의 유명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왜요? 자기들보다 못 배우고 무식해 보이는 예수의 말을 사람들이 더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 질투한 것입니다.

이 시기 질투가 작용 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죽였다 이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예수님의 심리를 분석한 ‘예수심리학’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결론은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시기 질투가 없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닮으려 하면 세 가지를 본받으라고 충고합니다. 

잘 웃고, 칭찬을 잘 받아들이고, 칭찬을 하라가 그것입니다.  

 

잘 웃어라, 그렇습니다. 남이 웃길 때 잘 웃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이 웃길 때 시무룩하고 웃는 남까지 비웃어서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가 우습다고’ 이런 사람들은 구제불능입니다. 

노예한테는 웃음이 없습니다. 주인은 웃지만 노예는 웃지 않습니다. 

 

옛날 동독 사람과 서독 사람을 구별하는 단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서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말끝마다 ‘Danke schon’을 연발하는데 

동독에 가면 ‘Danke’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공산주의의 기본은 혁명입니다. 북한을 보면 모든 것이 혁명입니다. 

예를 들면 ‘모내기 혁명’입니다. 

혁명이란 말 자체의 개념을 상고해 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고생하는 것은 부르조아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다 없애야 한다. 이것이 혁명의 철학입니다. 

혁명하는 사람치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는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과거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지금 다시 시작하면 

새하늘과 새땅이 열린다. 다시 시작하지 않고 나 있는 그대로 시작하려니까.

 

그냥 우스운 이야기가 있거든 그리로 끌려 가십시오. 아재 개그.

 

그리고 칭찬을 잘 받아 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이 나를 칭찬하는데 잘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등감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칭찬하면 비꼬지 말라고 합니다. 

 

또 남 칭찬을 많이 하라고 합니다. 정 칭찬하고 싶지 않거든 칭찬할 때 

‘me too’라도 하라고 합니다. 고거라도 하십시오. 

남 칭찬할 때 꼭 깎아내리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건 망조입니다. 

칭찬하라, 칭찬에 동조하라. 이게 중요한 겁니다. 

칭찬하는 순간 내 마음이 시원해 집니다. 그때 치유가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세례 요한은 멋지게 해결합니다. 

27절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아 얼마나 멋있는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 잘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 하나님께서 주셨구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깎아 내릴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 일입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었든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신 것입니다. 

누구 원망하지 맙시다. 탓하지 맙시다. 질투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입니다. 하늘이 내신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도 하나님께서 주신 바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왜 불공평하냐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왜 저 사람에게는 주고 나는 안 주냐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는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원래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온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인기가 높아져도 세례 요한은 이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내 위치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이란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요기까지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요기까지다, 내가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요기까지다, 내 나이가 지금 얼마다, 한계입니다. 

부에도 한계, 명예에도 한계, 건강에도 한계, limitation, 한계를 스스로 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걸 넘어서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는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내가 장가가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신랑 좋은 날이지만은 내 친구인 신랑이 기뻐하니까 나도 좋은 것입니다. 이 마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신랑이 행복하니까 내가 행복하고 그가 출세하니까 내가 출세하는 것 같고, 그가 기뻐하는 순간 더불어 기뻐하는, 이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잘 될 때 ‘아 잘 됐구만, 그 사람 그 동안 어려웠는데 참 잘 됐네’ 그런 마음 가져 보았습니까? 

누가 성공했다고 할 때 ‘참 잘 됐구만’ 그래 보았습니까?

대체로 그렇질 못합니다. 배가 아파진다고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퍼진다면서요. 우리 나라 사람은 이 병 때문에 다 죽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기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높아지는 걸 보며 세례 요한이 기뻐하고 신랑이 장가갈 때 그 친구가 같이 기뻐하고...

 

우리들은 효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효도란 무엇입니까?

부모들이 해 준 것만큼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부모들의 마음은 자식들의 행복입니다. 

자식들이 기뻐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명령입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희락의 서신.

4:4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신앙인의 기준의 첫 번째가 바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 좋다는 제일 기준을 기쁨에 둡니다. 

그런데 기뻐하는 것은 소유나 성취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은혜로 깨닫고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그 깨달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죄요, 내가 받은 것은 다 은혜입니다.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죄사하심 받은 자의 감격에 삽니다.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오직 은혜, 여러분 이 질문에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그 남편, 은혜로 만난 겁니까? 실수로 만난 겁니까?

지금의 그 아내를 볼 때 ‘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다’ 하십니까? 

아니면 ‘이건 역사적인 실수다’ 하십니까?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시고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은혜임을 

확인하면서 매일 매일 기뻐하는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하는 기쁨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해가 나면 밤에 빛나던 달과 별이 물러가듯이, 물러나는 기쁨입니다. 

나는 내 할 일을 다하고 물러가노라.

세례 요한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흥해지는데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잘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성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영광 받으시느냐가 더 중요한 법.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깨끗한 마음으로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살아갑시다. 

그 기쁨과 행복, 이것은 파동을 일으키고 파급효과를 냅니다. 

그래서 공명을 일으킵니다.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 기쁨 속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 세상 잘 되는 일이 있으면 다 같이 축하합시다. 

그게 다 내 기쁨입니다. 이런 호방한 마음으로 이 험한 세상을 이겨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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