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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원칙 (느헤미야 13: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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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물어 보시는게 이스라엘 지도 옆에 있는 표.

성경 읽기표, 나름대로 읽지 말고 이 표대로.

 

지난주에 느헤미야를 읽다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아야, 주일 성수와 십일조

십일조나 안식일이나 십계명이나 모두 구약의 얘기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약의 말씀이지만 모두 신약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적인 것은 안 지켜도 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전혀 틀렸습니다. 구약은 신약에서 완성됩니다.  

 

느헤미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전반부 1-7장은 이스라엘 회복의 외적 증거인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보여 주었고, 후반부 8-13장에서는 

회복의 내적 증거, 즉 신앙 회복과 제도 정비 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장 28절 이후에 보면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여 영적 순수성을 지키기로 하고, 안식일 준수, 십일조 등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그런데 본서의 마지막 장인 13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을 보여 주고있습니다. 

신앙은 한 번 은혜 받고, 한 번 잘 섬긴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은혜 받아야.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변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 중심인 교회, 담임 목사의 경험. 종교개혁 500주년, 말씀으로 돌아가자!

 

사람이나, 공동체가 무슨 일을 이루고자 할 때 분명한 목표와 원칙, 기준이 없으면 주변 사람 관계와 환경에 따라 흔들리게 되며 혼란이 따라 옵니다.  또한 어떤 목표와 원칙,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삶과 공동체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원칙과 기준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원칙과 기준이 같다면 그것은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13장을 보면 느헤미야의 세 번의 기도가 나옵니다. 

느헤미야의 세 번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세웠던 세 가지의 원칙과 기준을 무시하고 타락했을 때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면서 드린 기도입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벽을 건축할 때가 아닥삭스다 왕 20년인데, 느헤미야가 12년 후인 아닥삭스다왕 32년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왔을 때 성전이 변질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개혁입니다. 그전까지는 서로 비슷하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때문에 영적으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말씀이 중요.

개혁이란 즉시 회개하는 것이고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1절 “그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런데 거기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 사람이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3장 3-6절을 읽겠습니다.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이 결혼하면 서로 얽히기 시작합니다.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 백성과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이 얽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솔로몬이 이방 여자와 결혼해서 큰 낭패를 본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진정성과 순결입니다. 신앙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영적인 간음과 혼음입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거꾸로 말하면 귀신을 쫓는 방법입니다. 

십계명에 있는 모든 얘기가 귀신들이 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마음대로, 정욕대로, 이성으로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면 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고 복을 받고 싶으면, 교회생활을 잘 하십시오. 

교회를 정하고 충성하십시오. 그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성전은 구약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신약에 와서는 예배드리는 곳.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형식화되어 갑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것이 새롭지 않고 감동도 없게 됩니다. 이러다 보면 먼저 교회에 대해 시큰둥해집니다. 교회가 신앙의 중심인데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교회를 우습게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섬기지 않고 자신의 방법대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집에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큰 만큼 잘라내어 죽였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게 늘려서 죽였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침대에 키가 딱 맞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에게 잡히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신화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프로크루스테스의 체계’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기준을 판단하는 아집을 비유하는 관용구로 사용됩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도비야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도비야는 성전을 건축할 때 산발랏과 함께 느헤미야를 괴롭힌 사람입니다. 성벽을 짓지 못하도록 얼마나 나쁜 방법으로 모함하고 음모를 꾸미고 괴롭혔습니까. 그런데 산발랏의 사돈이 된 제사장이 도비야에게 방을 내줬습니다. 4~6절을 읽겠습니다. 

느헤미야가 성전에 돌아와서 보니까 성전 방안에 도비야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비야가 제사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그 방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까짓 방 하나 빌려주면 어떠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작은 여우.

군대 생활할 때 내무반에 쥐가 왔다 갔다, 우리는 막대기로 툭툭, 

쥐박사가 입대. 쥐구멍을 찾아서 다 막아.

성전 건축 후 오랜 세월이 지나자 사람들의 생각이 무뎌진 것입니다. 

성전을 비롯해 십일조와 안식일도 형식적으로만 지키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타협하다보니 암몬사람, 모합사람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도비야까지 성전 창고에 방을 주어 살게 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10년이 지나면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합니다. 

원형과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사회, 가정,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신앙 개혁은 십일조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돈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돈에 대해 매우 예민한데, 여기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십일조라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평생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 원칙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동업. 부자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새는 돈이 없게, 목사들끼리는 우스개 소리로 다들 십일조한다. 

 

세 번째, 안식일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바빠서, 세상이 좋아서 안식일마저 지키지 않습니다. 

 

교회가 새로워지는 방법은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거룩하게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성전 정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 “내 집은 기도하는 집”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성전을 성결하게 다시 세운 이후에 드린 첫 번째 기도가 14절의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격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게 했습니다.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과 정신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드린 두 번째 기도가 22절 나옵니다. 

암몬과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하며 이방신들이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는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운 믿음의 원칙이 사람의 관계와 상황에 따라 무너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가정을 다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드린 기도가 31절입니다.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내용은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라는 느헤미야의 기도입니다.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에서 야베스의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담겨 있는 역대상 4:9-10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성경에서 야베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곳은 이 말씀뿐입니다. 

이 말씀 안에서 야베스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 ‘가난’이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지어줄 때는 소망을 담아 좋은 의미의 이름을 붙여줍니다. 어떤 부모도 자녀의 이름에 ‘고통, 가난’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을 통해 그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생모와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웠던 난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야베스가 태어날 때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다른 또 한 가지는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아버지들이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야베스의 아버지는 아이가 임신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로 가세가 기울며 어려운 상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야베스의 삶의 자리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단어가 그의 기도 속에 나옵니다. 그는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그는 ‘환난, 근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성장하면서까지 야베스의 삶은 고통이 가시처럼 찌르는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야베스는 탄식과 원망을 하며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에 놀라운 반전을 일으켰습니다. 인생역전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베스의 삶을 생각하면 그에게서 가장 기억이 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환난과 근심을 넘어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베스의 기도.

 

느헤미야의 삶이 바로 야베스의 삶과 같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인생의 중심에 두고 그 분의 말씀을 원칙과 기준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복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가치였고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느헤미야를 높이셨고 그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느헤미야가 붙잡았던 말씀 안에서의 원칙과 기준을 

우리들 또한 간직해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담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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