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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복음 17:11-19)

목사님 0 914

   

 

     안창호의 글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건전한 인격.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 삶의 최고의 안내서로 인정하느냐, 아니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기준은 ‘그 사람이 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가?’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임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먼저 은혜 받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하는데 부활이란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알아야 부활을 압니다.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부활의 축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절망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같은 고난과 역경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를

알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없이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송을 계속 부르게 되면 숙연해집니다. 

내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감사란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답하고 싶어지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감동입니다. 

 

미국은 청교도의 신앙 위에서 출발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청교도들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오로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모든 고난을 헤치고 거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청교도들은 돈을 모으면 첫 번째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학교를 지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은 것이 자기 집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미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미국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거꾸로 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내 교회를 발견하게 되면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생깁니다. 

정말 교회가 천국과 같은 곳임을 알게 됩니다. 

내 생애에 만날 수 없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내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에 문둥병자 열 명이 멀리 서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호소했습니다.

12절 “멀리 서서” 문둥병자들은 사람들 곁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시기를 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문둥병자가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을 보이고 확인을 받아야만 비로소 정상인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문둥병자들의 부르짖음에 예수께서는 그 자리에서 화끈하게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증세는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기도한 사람들의 느낌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도 문제는 

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상에서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기도의 내용을 믿는다면 행동도 거기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영의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의 자세로 기도하느냐가 기도 응답의 가장 큰 조건입니다.

기도해도 되지 않을 거야,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다가 어느 시점인지는 몰라도 병이 나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굴을 만져보니 감각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나병환자는 사회에서 소외당하지만, 과거에는 문둥병에 걸리면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죽은 자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둥병의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깨끗해 졌으니 그들의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침을 받은 10명 중에서 아홉 명은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우리가 그렇듯이 “우리가 나을 때가 되어서 회복된 것인지 몰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1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오직 한 사람 감사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끌고 가고 앗수르 사람들을 그 곳에 이주시킨 앗수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아니라 앗수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아홉 사람한테 감사를 못 받아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 아홉 명의 영혼이 불쌍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연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서 찬양받고 싶어하십니다. 

 

아홉 사람은 이제 병을 고침 받은 마당에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이 경우에, 예수님은 병을 고침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팡이를 의지하듯 예수님을 의지하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면 지팡이를 버리듯 예수님을 등한시합니다. 

 

우리 모두는 칭찬받은 사마리아 나병환자처럼 감사를 표시해야 합니다. 

감사는 우리 신앙의 초석과도 같습니다. 감사가 없는 신앙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감사가 없는 신앙이 기복 신앙. 

16절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어 샤카는 ‘엎드린다’ ‘무릎을 꿇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예배드렸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12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리기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예배 받기 위함입니다. 

예배는 신자에게 의무요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못 옵니다.” “우선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멀고 시간 많이 걸려 못 옵니다.” 9명의 환자들이 한 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에 속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볼 때 확률은 10대 1입니다.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감사의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예배입니다.

 

열 사람이 문둥병을 고침 받았을 때 아홉 사람은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병 나은 것을 확인받고는 각자가 원하는 길로 갔습니다. 

사실, 먼저 예수님께 돌아와서 사례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그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방금 전만해도 그들은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병이 말끔히 나았을 때 발걸음을 돌려 주님을 찾아와서 감사를 드려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아홉은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 아홉 사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생각나게 합니다. 

출애굽 일 세대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수없이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즉시로 감사를 실천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건 적절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이는 감사하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부가 씨 뿌릴 때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듯이, 감사도 때를 놓치면 감사다운 감사를 드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비 나중에 오는 것 소용없슴.

먼저,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있거든 즉시로 “하나님, 감사하나이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의 찬송을 부르십시오. 우리가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때, 그 찬송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감사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사람은 깨닫는 만큼 감사하게 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배운 것이 많다고 감사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날, 한 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만이 진심으로 감사를 깨닫게 되고 풍성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 생각나거든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이 사마리아인처럼 즉시로 감사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 사람은 육체의 문둥병을 고침 받았지만, 

우리들은 영혼의 문둥병을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병균은 외부 자극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그리하여 뜨거운 것도 뜨거운 줄 모르고 만지고, 추운 겨울에도 손발이 어는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나균인 죄에 감염되면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서 죄를 

지으면서도, 주일 성수를 안하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나병균은 사람의 육신을 망가뜨리지만, 죄는 사람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열 명의 문둥이가 예수님을 만나 깨끗함을 받았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혼의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쪽박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풍 속에서도 결실을 맺는 과실이 있듯이 대박집은 분명히 있게 마련입니다.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뿐인 이 세상이라고 외쳐도,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어,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감사를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아 더 큰 은혜를 받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5장~11장

 

5장

1-11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성령 기만 사건

아나니아의 잘못은 재산 처분액의 일부를 전부인 양 위장, 서원하고 

12-16절 사도들의 표적과 복음의 확산

17-32절 사도들의 투옥과 구출 및 변론 

17절 사두개인의 당파, 산헤드린 공회원들, 29절 

33-42절 가말리엘의 중재

가말리엘은 사도 바울의 스승

36절 드다는 제2의 엘리야라고 주장한 인물

37절 갈릴리 유다, 호적 조사에 반대해서 반란을 일은킨 인물

 

6장

1-7절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선출

외국에 살다가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밀려 구제에서 제외되므로 집사를 뽑기로 함. 

8-15절 스데반 집사의 사역, 오스트리아 빈

 

7장

1-19절 스데반의 설교, 족장 시대의 역사를 통한 교훈

20-36절 스데반의 설교, 모세를 통한 교훈

37-43절 스데반의 설교, 불순종의 죄

44-50절 스데반의 설교, 성전 숭배의 잘못

51-53절 스데반 설교의 결론

54-60절 스데반의 순교

 

8장

1-3절 사울의 박해

4-8절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빌립은 일곱 집사 중 하나

9-13절 마술사 시몬

14-25절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

26-40절 에디오피아 내시의 구원

 

9장

1-9절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회심

10-18절 사울의 회복

19-25절 다메섹에서의 사울의 사역

26-31절 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핍박과 교회의 인준

32-43절 베드로의 순회 전도

33절 애니아는 헬라파 유대인

34절 다비다는 히브리식 이름, 도르가는 헬라식 이름

 

10장

1-8절 고넬료가 본 환상

9-16절 베드로가 본 환상

17-23절 고넬료가 보낸 하속들의 욥바 도착

24-33절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

34-48절 고넬료의 회심과 성령 강림

 

11장

1-18절 이방인 성령 강림에 대한 베드로의 변론

19-26절 안디옥 교회의 설립 26절

27-30절 안디옥 교회의 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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