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11장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 6:1-6, 453장
40일 금식기도하신 예수님에게 사단의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단 밥부터 먼저 먹고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인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 이전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을 죄악시하거나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과 하나님의 말씀, 산상수훈의 차이는 아주 작아 보입니다.
하고 먹으나, 먹고 하나 뭐가 문제일까 싶습니다만 나 자신의 일을 먼저
챙기고 하나님의 일을 뒤로 미루면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내 몫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 몫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몫보다 내 몫을 앞세우는 우를 범하기가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성경을 살펴보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약하다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하라’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지워지다’, ‘닳아빠지다’입니다.
빛바랜 초상화처럼 낡고 퇴색돼서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헬라어 ‘아스테니아’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힘이 빠지다’, ‘병들다’입니다.
병상에 누운 환자처럼 원래 제 힘을 쓸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 인간의 모습은 본래의 능력과 기능을 상실한 채 쉽게 쓰러지고 넘어지고, 그리고 제 힘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42:3에서 이런 연약한 인간의 실상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갈대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들풀입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상한 갈대입니다. 꺾여져서 반쯤 부러진 갈대라는 말입니다.
이제 세찬 바람 한 번 더 불면 완전히 쓰러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유혹이 몰려오고, 시련이 닥쳐올 때 싸워 이기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고 쉽게 쓰러지고,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등불은 기름으로 불을
밝힙니다. 그런데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불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기름을 채워주지 않으면 스스로 불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밝힐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세우고, 스스로 회복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내가 뭐 좀 하는 줄 알았더니 내가 약하더라. 이게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이 제일 기분 나빠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아닙니까?
다 많이 알고 다 나름대로 똑똑하다고들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니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들려지는 것도 없습니다.
꽉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BC 750년에서 북왕국이 멸망한 BC 722년경까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패역한 상황이었습니다. 호세아는 4장 1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참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잠언 1장 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자본이 없는 것이 아니요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일련의 모든 도덕적인 패륜행위도 알고 보면 바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자신에게 못을 박고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시면서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식의 소치입니다.
그래서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설파한 것입니다. 우주의 이치, 우주의 원리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는 게 많다고 자랑들 했지만 소크라테스가 볼 때에는 정말 알아야 할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모르는데 그 외에 아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느냐 함입니다.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알면 머리만 복잡해지고 실제로 알아야 될 것을 모르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을 아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평생 자성하고 반성해도 나 자신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 때에 비로소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캘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에 대한 지식도 없다.”
하나님을 알 때에 비로소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에 대한 지식이 절대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정신 병자가 ‘나는 나폴레옹이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뒤에 정신 병자가 ‘쟤는 짝퉁이고 내가 진짜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한 사람이 ‘내가 언제 너희들을 임명했느냐!’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가나안 땅의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같이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게 문제.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일조가 나를 지켜줍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옛날에는 신문 광고란에 잘 나오던 광고가 “누구 누구야 옷 고쳐 놓았다.
집으로 돌아와라, 문제 해결 되었으니”
“집으로 빨리 돌아오너라. 엄마가.”
그렇습니다. 더는 아무 말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돌아오너라.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그냥 어머니의 사랑만 있을 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런 것 전혀 묻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그 것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을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의 바른 응답은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저 앉아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아느니 모르느니, 이렇게 될 것이다, 저렇게 될 것이다. 그럴 것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그냥 돌아가는 것이 바른 신앙인 것입니다.
273장 1, 2, 5절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의 ‘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체험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즉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왜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강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무엇을 알라는 말씀입니까?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헤세드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계속 알면서 그 깊은 세계, 더 엄청난 능력을 순간순간 확인하면서
여호와를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무엇을 아느니 모르느니 해 보았다 다 피상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하나님의 주변적 이야기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모릅니다.
우리는 관심이 있는 만큼 알게 됩니다. 사랑한만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경험한만큼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을 알아가야 하겠습니까? 어느 측면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성, 원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이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당하는 고통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그 애타는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그 분을 진정으로 아는 길입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Love of God is concreted in His wrath”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 속에서 구체화된다는 것입니다.
그 징계 속에서, 그 치시는 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시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그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지금 오늘도 많은 사건, 많은 진노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강하게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그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싸매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치시고 싸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만 하면.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요즈음에 와서 대기오염이 심각해졌고 생태계의 파괴도 눈에 띄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상 기후, 이상 기온, 원인 모를 새로운 질병들이 날로 날로 우리 앞에 다가 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원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물은 확실히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나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일 때에 한합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만물은 인간에게 복종하고 인간을 돕게 됩니다. 이것이 본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질서가 무너지고, disorder.
정신이 물질의 노예가 되고 영이 그만 육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내 불행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 가난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기술 개발도 좋고 생산 증대도 좋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먼저 내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세대를 ‘지식의 홍수’ 세대라고 합니다. 유튜브.
홍수 때 제일 필요한 것이 식수이듯이 이 지식의 세대에 사는 우리들도
세상 모든 이치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무식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약하니까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좋으나 이것 두 가지 만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께서 나의 구주라는 것.
이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나님만을 똑바로 알고, 일대일로 하나님의 그 놀랍고 구체적인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에 나 자신을 알고, 내 운명도 함께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살아오던 삶의 방식에서 돌이켜
그 넓게 펼쳐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