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2-28장
신앙인의 언어생활, 야고보서 3:1-12, 420장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가 기록한 글입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야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는 30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지냈습니다.
그 야보고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야고보서는 5장으로 구성된 짧은 서신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서신에서 매 장마다 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매 장마다 이렇게 말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은 야고보가 삼십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결국은 말 때문이더라는 겁니다.
가정의 불화도 말 때문이요, 교회의 분열과 다툼도 결국에는 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6절에서도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3절을 보면 달리는 말은 비록 사람보다 힘이 세지만, 그 입에 재갈을 물리면 사람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 말의 입에 물리는 조그마한 재갈이 말의 온 몸을 어거하고 제어하여 사람에게 순종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4절에 ‘배에 붙어 있는 키의 기능’에 비유하여 말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의 뒤꽁무니에 붙어 있는 ‘키’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은 물속에 들어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키를 이용하여 선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조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배의 키는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엄청나게 큰 배의 방향을 잡아줄 뿐만 아니라 배를 안전하게 항구로 인도해 나갑니다.
야고보는 말과 재갈, 배와 키, 몸과 혀를 비교시켜서 혀가 작지만 혀를 제어하지 않을 경우 엄청난 범죄가 발생하게 됨을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서 야고보는 말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말은 마치 불과도 같다고 합니다. 불은 한번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의 여파는 엄청납니다.
말을 내뱉는 것은 불을 지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릇 자기 혀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입술에서 저주의 말을 버려야 합니다. 파괴의 언어를 제거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축복의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들어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언어를 쓰면 주변에도 부정적인 영향,
크리스찬이면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하지 않을까?
한 마디의 말이 우리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대단한 위력을 나타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혀는 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성경 7절~8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짐승은 능히 길들일 수 있습니다.
서커스를 보면 무서운 사자나 호랑이도 조련사의 한 마디에 꼼짝 못합니다. 앉으라고 하면 않고,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나고, 가라고 하면 가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그렇게 순한 양 같을 수 없습니다. 잘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소서!”
사도 야고보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거짓된 경건의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어보면 이것은 은혜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함부로 내뱉어지는 말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장 26절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적인 자리든지 공적인 자리든지 꼭 필요한 말만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대의 말을 많이 듣는 편이 되어야 합니다.
옛 말에도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말처럼 우리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많이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말하기는 더디 하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남들이 말하는 바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겸손히 상대방의 말을 듣는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절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가장 나쁜 사람은 자신도 온전하지 못하면서 남의 약점과 아픈 곳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원칙을 따지기를 좋아 합니다.
나에게는 복음 상대방에게는 율법, 나에게 율법, 상대방에게 복음
마태복음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 들어오는 생각은 전원 플러그입니다.
내 생각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결정됩니다.
돈, 지식, 아는 사람. 하나님께 플러그 인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치유와 회복의 역사는 내가 가진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겸손하게 무릎 꿇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기적의 출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인간이 끝이라고 할 때부터 하나님은 시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면.
오늘 집을 나서기 전
오늘 우리가 금해야 할 세 가지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이라는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됩니다.
거짓말은 마치 살인과 같습니다. 십계명의 9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똑같은 말도 말의 뉘앙스를 바꾸면 다르게 들려질 수 있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똑같은 말도 전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다르게 편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거짓말입니다.
우리 입술에서 거짓을 제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로 금해야 할 말이 수군수군하는 비방의 말입니다.
믿는 우리들의 입에서는 이제 그런 말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수군수군하고 비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입에서는 그것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주방을 아주 없앴다고 합니다. 너무 주방에서 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곳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끼리끼리 모일 때 거기서 우리가 범죄하는 것입니다.
기껏 예배당에서 은혜 받고, 나가서는 다 은혜를 쏟아버립니다.
집에 가면 ‘내가 오늘 뭐 하러 교회 갔나?’
또한 우리가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저주의 말입니다.
성경은 저주를 금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4절에 보니까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우리는 저주할 권세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축복할 권세만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주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린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를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저주는 곧 돌아서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축복하면 그 축복이 내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저주하면 그 저주가 곧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이 꼭 한국의 낫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던지면 그것이 돌아서 자기 손에 정확히 돌아옵니다.
말은 부메랑과 같습니다. 내가 남을 축복하고 격려하면 그 축복과 격려가 결국 내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내가 남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곧 나를 향한 저주가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황금률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12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여러분 내가 남에게 축복을 받고 싶으면 여러분도 남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저주받고 싶으면 남을 자꾸 저주하세요. 그럼 그 저주가 내게로 돌아온다는 부메랑의 원리가 성경에도 엄연히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마지막 권면을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들었습니다.
본문 11-12절에 보면 우리의 언어생활을 ‘샘과 열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한 우물에서 두 가지 종류의 물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쓴 물을 내는 우물에서 단물을 동시에 낼 수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입은 하나인데, 그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를 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한 나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열매를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감을 맺을 수 없으며, 감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들은 찬양과 저주과 같이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통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 35절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한 내용 중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사람의 말은 곧 그 사람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언어생활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마음과 인격과 신앙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언어생활은 곧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이요, 인격의 표현이며,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좋은 말을 선포하고, 축복의 말을 선포하는 것, 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우울함이 찾아올 때, 낙심될 때, 좌절될 때, 희망의 말, 승리의 말을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꾸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여기까지 나와서 우리가 죽는다고.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갚아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그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하나님의 갚아주십니다. 우리 입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제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치유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축복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 보이는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을지라도 여러분의 미래를 향해서, 여러분의 자녀의 앞날을 향해서
축복을 선포하시고, 믿음을 선포하시고, 치유를 선포하시고, 은혜를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