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애가 4-5장
오바댜
요나
성탄절, 누가복음 2:8-20, 109장.
이제 2023년 성탄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성탄절 전야,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내일이 성탄절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의 자세와 준비를 가지고 성탄을 맞이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세상의 왜곡된 문화에 휩쓸리지 말고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탄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Merry Christmas! 성탄절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성경만큼 미래에 대한 약속과 꿈을 말한 책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요셉에게도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환경으로 볼 때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고
그 비전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주신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사야서에서는 그 보다 더 큰 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 700여 년 전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이게 복음입니다. 영어로는 good news.
더 나아가 미가에서는 태어날 장소까지 특정하고 있습니다.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리고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성탄”이란 말은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뜻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축하하고 같이 기뻐하는 날입니다.
요즈음은 모든 사람들이 성탄절을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고 알고 있지만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354년경)부터 라고 하는데 로마카톨릭과 개신교는 12월 25일, 동방정교회,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 등은 1월 7일,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날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탄일이 다르게 된 것은 서로 다른 달력을 쓰기 때문입니다.
서로마제국에서는 그레고리력, 동로마제국에서는 율리우스력.
예수 탄생 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데 마태와 누가복음 이 두 기록은 몇 가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동방 박사의 경배를 받으신 것 등을 언급하고 있고 누가는 양치는 목동들의 경배를 받으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2,000여년전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온 인류에게 주어진 은혜와 축복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가 없는 우리의 상태는 무엇이었습니까?
골로새서 1:21 말씀에는 우리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절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였습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일찍이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수많은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때로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을 통해서, 때로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같은 징계를 통해서, 때로는 전쟁과 재해와 기아와 같은 고난을 통해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우리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서 몸소 인간에게로 오셨습니다. 적극적으로, ‘네가 나에게로 오라’가 아닙니다.
‘너 있는 곳으로 내가 가마’였습니다. 몸소 공간을 옮기십니다.
이 사건이 바로 주님의 오심입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성육신’ ‘Incarnation’ 친히 육신을 입고 오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서 역사 안에 들어 오셨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탄을 일컬어 ‘In-breaking’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in’은 ‘들어오다’라는 뜻이고 ‘break’는 ‘깨뜨리다, 부수다, 파괴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In-breaking’은 곧 굳게 닫힌 문을 깨부수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알아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우리가 아닙니까?
그 높고 튼튼한 성같고 담같은 ‘벽’을 깨부수고 들어오셨습니다.
역사 안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심입니다. 성탄의 사건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되심입니다. 헬라어로는 ‘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
존재의 바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탄의 주제는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증명해 보이신 사건이 성탄의 사건입니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사랑은 현장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 함께 있어야 사랑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하여야 사랑인 것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을 만나 한 이야기는 10절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8절 ‘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그들은 밤에도 밖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성실하게 자기 직무를 감당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 가는 사람들은 평상시에 자기 일에 성실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지구의 종말이 오면 그냥 직장에 출근하시다가 그리고 거기서 성실하게 일하다가 여러분은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게 자기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0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어디로 돌아갔습니까?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그들 본연의 일터, 본래의 자세대로 돌아갔습니다. 흥분하고 들떠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생활 속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한 체험을 하고 난 후 들뜨고 흥분하여 그 자리에 움막을 치고, 기도원을 세우고, 신유의 은사가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야단 법석을 떱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와 함께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그리고 거기에서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거기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은혜를 받고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받은 은혜를 증거하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 생활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자기 생활에 충실치 못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늘 나라의 대사입니다. 그런 Identity를 가지고 사셔야 합니다.
자기 가정을 잘 돌보고, 자기 직업에 성실하고
바로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고는 우리들은 주어진 자기의 일터에서 힘써서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것입니다.
캘빈은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calling)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메시야의 탄생을 기뻐하며 찬송하며 돌아가야 할 장소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이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의 소식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입니다.
세상은 기쁜 소식에 목이 말라 있습니다.
정말 자고 일어나도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답게 주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아기 예수 탄생의 이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례 식
성탄절 성찬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