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9-52장, 애가 1-3장
꿈꾸는 자, 창세기 39:1-6, 384장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슬픈 사람입니까? 시한부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까?
파산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정말 불쌍하고 슬픈 사람은 바로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이 없으니까 날마다 그 날이 그 날입니다. 아무런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꿈이 없으니까 내일이 반갑지 않습니다.
‘꿈이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사람은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꿈이 있는 사람, 비전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평생의 걸작을 꿈꿉니다. 사업가는 성공을 꿈꿉니다.
학생은 합격을 꿈꿉니다. 운동선수는 우승을 꿈꿉니다.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는 행복한 가정을 꿈꿉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있으며 그 꿈을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며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저는 막연히 우리 교우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최고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성경 일독을 빼놓지 않고 하시는 어느 순간부터 전도를 통한 교회의 부흥이 제 마음 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도, 잊어버린 단어, forgatten word.
전도가 제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하고 교회 부흥의 꿈을 꾸기 시작했더니
좋은 새신자가 들어오고 어제 밤에는 문리아가 이번 성탄절 감사예배에
세례를 받으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와 보라! 말씀 듣고 점심 먹고
여러분들은 약속한 성경 일독만 열심히 하면 저는 전도를 열심히 할 작정입니다. 남은 목회에 소망이 생겼어요.
꿈 하면 성경에서 우리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요셉입니다. ‘꿈’을 빼놓고서 요셉의 생애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별명은 꿈꾸는 자, 꿈쟁이(Dreamer)입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고,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간직하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요셉의 꿈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꿈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계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환상’과 더불어 ‘꿈’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중에는 자꾸만 목사를 해몽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 비전을 가져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을 같이 읽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환상을 보든, 예언을 하든, 꿈을 꾸든, 이 세 가지 표현은 쉽게 말하면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무언가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열일곱 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밭에서 열 한 개의 곡식 단이 일어나 자기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또 며칠이 지났는데 열 한 별이 자기를 둘러서서 절하는데 해와 달도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자 너무나 흥분해서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런 꿈을 꿨다고 막 자랑하였습니다.
요셉은 자랑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왕따 당하고 미움을 받다가 미디안 장사꾼에 의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종이 되어 팔려갑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들이 닥치는 것이 이렇지 않습니까?
고난은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다가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부분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왕자처럼 살던 한 아들이 갑자기 노예로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몸이 마비되거나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군대 갔을 때에 엄청난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합니다. 더더구나 어린 요셉이 이런 문화적인 충격을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무렵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랑하는 아들 요셉아! 이 모든 시련은 네가 총리대신이 되고 가족과 민족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니라. 조금만 참고 견디거라.” 그랬다고 하면 13년이 아니라 130년도 견딜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꿈속에 자주도 나타나시던 그 하나님께서 왜 고난의 현장에서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에 가면 풀도 나무도 생물들이 자라지 못하는
수목한계선이 있다고 합니다.
이 수목한계선상에서 자란 나무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자라게 된다고 합니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사람들은 수목한계선상에 있는 무릎 꿇은 나무들을 베어다가 바이올린을 만듭니다. 그러면 가장 아름다운 공명을 내는 악기가 된다고 합니다. 최고의 작품은 고산에 있는 무릎 꿇은 나무들을 통하여 최고의 바이올린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인생에 고난을 겪습니다. 어려움을 겪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겪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요? 세상을 울리는 가장 멋진 공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나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1절의 이야기는 요셉을 통하여 세상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요셉을 수목한계선상에 집어 던졌다는 것입니다.
2절 넘어오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의 생애 가운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바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는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때 나타난 단어가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 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은 돈이 될 수도 있고, 부동산이 될 수도 있고, 주식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열심이 될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둔해 집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에, 지시에 민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이 끼어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기 시작합니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될 때 우리가 어떤 고난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는 단어입니다.
함께 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까?
2절 계속되는 말씀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오늘 부른 찬송가 434장을 보면 후렴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여기 무슨 일이 무엇일까요?
때로는 실패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일 수 있습니다. 병든 것일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손해 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비난을 받는 것일 수 있습니다. 순교하고 죽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한다고 찬송은 말하고 있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도록 매를 맞고 감옥에 갖혀서 그 밤에 찬송을 불렀더니 옥문이 열립니다. 이 일로 인하여 간수장이 자결하려 하지요. 바울이 만류합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간수장이 예수를 믿고 그의 가족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매 맞는 것이 형통이라고 얘기합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이 형통이라고 얘기합니다. 왜요?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를 유럽 땅에 보낸 목적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통이란 단어는 신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에 그것을 잘 이기고 극복하는 능력이 내 속에 체질화되어지고 습관화될 때 우리는 한걸음 더 전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를 방해하지만 나는 한걸음 전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이런 요셉의 형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절에서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본다”는 단어가 2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았습니까? 이방인인 그의 주인이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어 저 사람 뒤에는 누군가가 있어.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요셉이 가는 곳곳마다 형통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막연히 느낀 것이 아닙니다. 어림짐작한 것이 아닙니다. 소문들은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본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신임을 얻습니다.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가정 총무는 집안을 다스리는 종들 가운데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젊은 노예가 한 명 왔습니다. 일을 맡겨 놓으면 정확하게 일을 합니다. 장사를 시키면 이윤을 많이 남깁니다. 어디 증권에 투자하면 몇 배가 올라서 갑자기 부자가 됩니다. 이럴게 아니라 우리 집 재산 몽땅 다 요셉한테 맡기자. 요셉 네가 맡아라.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투자를 하는 것이 옳습니까? 묻습니다.
투기는 나쁜 것이지만 투자는 좋은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쓸 것도 아닌데 많은 집을 수십 채를 가지고 땅을 쓸 이유도 없는데 괜히 땅을 사놓고 오르길 바라고 부동산 정책을 방해하는 것은 투기이지요.
잠언 21:5절에 보면 조급하게 돈을 벌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조급한 자는 궁핍하게 된다. 빨리 부자가 되고자 하면 망한다는 얘기입니다. 증권에 투자하더라도 장기 투자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가장 좋은 투자는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이윤이 제일 많이 남습니다. 록펠러.
이중표, 3억, 십일조 시작하고 이야기 합시다.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는 걸 내가 어떻게 축복해?
십일조는 온전하게, 자기 교회에 매달 정한 날짜에,
언제부터 복이 내리기 시작하였나?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획을 확실하게 긋고 있습니다. 요셉이 만지기 시작한 때부터, 요셉이 관여하기 시작한 때부터, 요셉이 주관하기 시작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이방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애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 자녀를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이 만지는 모든 소유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 있는 자는” 복은 있는 것입니다.
존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복 있는 존재가 되면 내가 가는 곳에 복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가정 안에 복이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 복덩어리가 가면 공동체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은 꿈을 꾸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꿈이 고난에 부딪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분명히 내게 비전을 주었는데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처럼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그 꿈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꿈이 있는 사람들은 인내를 더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인내함으로 참고 견디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감으로 하나님 주시는 꿈을 이루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