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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다니엘 3:13-18)

   

 

     35-42장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다니엘 3:13-18, 79장

 

오늘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당대 누구도 당할 자 없었던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공식적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나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후예다.”

또한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인류를 위협하며 쳐들어오는 함선의 이름이 

느부갓네살 호입니다. 

 

주전 605년 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유다왕 여호야김을 비롯해 많은 유대인들을 첫 번째 포로로 끌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1차 바벨론 포로기인데 이 때 느부갓네살이 아무나 다 붙잡아 간 것이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만을 뽑아 잡아가 이들을 바벨론 언어와 각종 학문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이들로 하여금 바벨론 왕에게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의 똑똑한 젊은이들을 뽑아 동경제국대학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보내 장교가 되게 한 것도 조선인으로서 일본을 위해 충성할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과 같은 것입니다. 

이 때 뽑혀간 젊은이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 사람들이 이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말도 바벨론 언어인 갈대아어를 쓰게 하고, 학문도 바벨론의 학문만 가르치고, 음식도 왕이 직접 하사한 진미와 포도주만 마시게 했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이들 유대 젊은이들의 언어와 지식과 식성과 가치관을 바꾸어 철저하게 바벨론을 위해 충성하는 신복으로 만들려는 음모인 것입니다.

브레인 워시, 이를 잘 알고 있던 다니엘과 세 친구는 뜻을 정하여 왕이 내리는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았습니다(1:8). 

그들은 이것이 단순히 음식만의 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까지 바꾸어 놓을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열흘 동안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은 이들의 얼굴이 오히려 그것을 먹은 다른 젊은이들보다 더 아름답고 윤택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에게 모진 시련의 바람이 휘몰아쳐 옵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권위와 왕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웠습니다. 바벨론 성 남쪽 약 10km 지점 ‘두라 평지’에 커다란 느부갓네살 모습의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제막식 날부터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금 신상 앞에 절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만약, “왕명을 어기면 활활 타오르는 풀무 불에 넣어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드디어 제막식 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악기소리에 맞추어 

왕명에 따라 금 신상 앞에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절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시기하고 있던 신하들이 그들이 절을 하지 않는다고 왕에게 이릅니다. 

왕은 크게 노하여 당장 그들을 끌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는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회유합니다. 15절 “이제라도 너희가 절하면 살려주겠지만 절하지 않으면 당장 너희를 

극렬한 풀무 불 속에 던져 넣겠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를 풀무 불 속에서 

건져낼 신이 어디 있겠느냐?” 

22절에 보면 이 풀무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세 사람을 던져 넣으려고 붙잡고 있던 사람조차 그 불꽃에 타 죽었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제 막 이들을 극렬한 풀무 속에 던져 놓으려는 절대절명의 순간입니다. 

물론 눈 한 번 딱 감고 신상 앞에 절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안 그래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 당연히 왕에게 더 큰 총애를 받게 될 것입니다. 까짓것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때 느부갓네살의 회유를 들은 그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6절을 보세요. 이 세 사람의 대답이 나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에서 느부갓네살이 회유한 것, 즉 지금이라도 신상 앞에 절하면 살려주겠다는 말과 나아가 그 어떤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이 극렬한 풀무 불에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이 일에 대해 왕에게 대답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심지어 우리가 당장 이 풀무 불에 던져져 타죽는다 할지라도 절대 왕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지 않겠고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극렬한 풀무 불 속에서, 그리고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실 것을 확신하므로 왕의 말에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분명한 믿음과 확신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니엘서는 그냥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시대가 마치 다니엘 당시 바벨론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온갖 우상이 판을 치고 무슨 도사 무슨 거사들이 우리 나라 미래를 좌우하고, 돈이면 다 된다는 맘모니즘과 부도덕, 양심에 털난 사고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나를 더럽히지 않고 순결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믿는 우리들은 아무나 만나서도 안 됩니다. 아무 곳이나 가서도 안 됩니다. 아무 일이나 해서도 안 됩니다. 

마귀는 작은 데서부터 야금야금, 우리를 더럽혀 죄로 오염시키고 죄악된 

세상에 휩쓸려 살도록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운 때를 만나곤 합니다. 

우선 삶이 너무 평안할 때, 우리는 교회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도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뱃사공이 능숙한 사공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고요한 바다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흉흉할 때 비로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탄할 때는 그 신앙의 진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극심한 환란과 시련 그리고 도전에 부딪혀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 주인공은 죽음의 길을 선택하고 이글거리는 풀무불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믿음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에서입니다. 

18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이 정금같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찌라도.’ 세 사람이 바로 이 말을 한 순간 금으로 만든 우상 신상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신앙이 정금 같이 빛난 것입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정확하게는 여호수아 사후부터 사울 왕 즉위 직전까지 약 340년 동안을 가리킵니다. 

간헐적으로 사사로 불리는 지도자들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그 시대의 모습을 단적으로 묘사한 게 사사기 21장 25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구절은 사사기 마지막 구절인 동시에 사사기 전체의 주제요 결론입니다. 여기서 왕이 없었다는 것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제멋대로 살았다는 말인데,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겁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잠언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제멋대로 살면 방황하고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2004년 3월에 저희 집사람이 삼천만원을 헌금하면서 저희 새하늘 교회는 

상암동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교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였고 

20명 남짓 모였을 때 교회가 있던 건물이 도로로 편입되면서 2008년도에 

강남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서부터 2022년 작년에 본건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임대료 

문제로 교인들도 시험 들고 저도 힘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헌금 문제를 가지고 설교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많은 성도분들의 헌신으로 그래도 교회를 지켜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새하늘 교회의 원칙이라는 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아서 오늘 같이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주일성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성수가 나를 지켜줍니다.

교회를 올까 말까 할때는 오셔야 합니다. 훌륭한 교인들은 무슨 일이 있으도  교회를 오려하고 신앙이 좀 떨어진 교인들은 교회 안 올 구실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십일조 할 수 있는 분들은 십일조를 하셔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나의 경제 생활을 지켜줍니다. 할까 말까 할때는 안하셔도

그대신 나의 경제 생활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선언

지각, 11시에 교회 문을 닫은 적이 있을 정도.

신앙생활은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그런 면에서 저희 집사람의 기도 제목, 주일 성수와 셀모임.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저에게 지켜주셔야 할 사항

지난 1년간 성경 일독, 여러분들이 유일하게 지켜주어야 할 사항

평균 3일 정도, 개인적인 톡도 보내고.

오늘부터 한 달에 3일 안 읽으면 우리 새하늘 교회는 마치도록 합니다.

저는 물론 2026년 5월에 마칩니다.

 

2023년의 마지막 달을 보내면서 신앙 생활에 대하여 다 같이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고난과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는 대개 낙심, 하나님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런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며, 만일 도와주지 않고 순교를 당하게 하셔도 감수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만 순교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조차도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찌라도의 감사’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은 이런 점에서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풀무불속에 던져진 세 청년은 놀랍게도 머리털 하나 상처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43:1

“너는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이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 속에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28절 

이하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마저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제 갈 길을 알고, 찾아 가는 사람에게 세상은 길을 비켜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현실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지난날 바벨론 역사의 재판입니다. 그리고 저 두라 평지의 풀무불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피부에 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온갖 유형, 무형의 풀무불이 우리 앞에 타오르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불길, 세속의 불길, 황금만능주의의 불길입니다.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찌라도’의 고백을 함으로써 크리스찬됨을 당당하게 증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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