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지혜, 고린도전서 1:18-24, 359장.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서로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약속을 잘 해야 합니다.
얼굴을 모르는 두 사람이 약속한 시간에 그 장소에 가서 만나러 온 사람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늦었나보다 하고 기다리다가 계속 오지 않으면 실내 방송을 합니다.
‘누구씨를 만나러 오신 분은 카운터로 나오십시오.’
그런데도 사람이 나오질 않습니다. 집으로 전화를 해 보면 분명히 만나러
나갔다고 이야기합니다. 몇 시간 기다려 보지만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갑니다.
상대편도 역시 똑같이 약속한 장소에 가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만날 장소를 ‘맥심’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 맥심이 두 군데 있었는데, 한 곳은 맥심 다방이고, 한 곳은 맥심 캐빈이었습니다.
여자 분은 당연히 맥심 다방이라고 생각을 했고, 남자 분은 당연히 맥심 캐빈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분명히 자기 나름대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다방에, 한 사람은 술집에 있었습니다.
맥심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도 제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개척 한 여러 교회 중에서도 성공적인, 부족한 것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5절에 보면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는 세상적으로 출중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장 7절에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이나 예언 등 하나님의 은사가 많이 나타났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 파가 갈리어 서로 다투고 싸우는 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 3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 교회의 교인인 글로에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책망하기 위하여 쓴 서신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도바울은 저들의 분쟁을 언급하며 책망합니다. 그리고 저들의 치명적인 분쟁을 종식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바울이 제시한 방법은 십자가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재판관의 역할이 아닌 십자가의 도로 풀려고 하였습니다. “도”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 라고 설명되어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고린도 사람들이 십자가를 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일종의 암호입니다. 하나님의 암호!
암호는 다른 말로 하면 ‘공개된 비밀’입니다.
누구에게 공개되는가 하면 자기 편에게만 공개합니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는 매일 매일 암호를 바꾸어서 부대원들에게 알려줍니다. ‘비둘기 - 평화’ ‘맹호 - 승리’ 이런 식입니다.
한밤중에 보초가 접근하는 사람을 행해 묻습니다. “비둘기!” 그때 “평화!” 하고 대답을 하면 통과입니다. 반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대면 발포해도 아무 소리 못합니다.
이처럼 암호라는 게 생사를 갈라놓을 정도로 중대한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 비밀을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다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들으면 선택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순순히 믿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할 때 믿음으로 “아멘!” 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의 암호가 등장합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자 하나님이 진노하여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었고, 그들은 온 몸이 부어오르고 죽어갔습니다.
그때 모세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암호를 알려줍니다.
놋으로 불뱀과 동일한 모형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대로 믿고 바라본 사람은 다 살았지만,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암호를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행위나 공로는 필요 없습니다. 이 믿음의 유무에 따라 모든 인간이 둘로 갈라집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둘로 갈라집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두 부류로 말하고 있습니다. 22절. 헬라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메시야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바랬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라면 표적을 보여주시오, 표적을 보여주시오’라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서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무능력한 것이었고, 우스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마지막까지 조롱하며 외치기를 ‘네가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를 구원하고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합니다. 그 표적이 보이는 곳을 향해 움직입니다. 병 낫게 해 주십시오. 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 만사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보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놀라운 일들이 내 주위에 일어나야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위로를 받습니다.
반면에 헬라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 과학의 힘으로 모든 질병과 인류의 문제를 극복하고 결국은 파라다이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대 헬라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추구한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영어로 필로소피입니다. 필로는 ‘사랑한다’는 말이고, 소피아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지혜와 지식을 찾아 나섭니다.
본문을 쓴 바울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적인 삶과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적인 삶을 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전통적인 바리새파 유대인었지만 또 헬라 철학에 능통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비웃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변화됩니다.
이런 변화를 본문 22절-23절을 통해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비웃었던 십자가에서 아주 놀라운 ‘십자가의 도’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24절에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고백을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의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집니다.
바울은 ‘내가 평생에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관입니다.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보고 사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데,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 중요한 관이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왜곡된 관을 바로 잡기 위하여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십자가 없이 세상과 역사를 보면 절망스럽게 보이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역사를 보면 소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상황이 사실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황 보다 우리의 시각에 문제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를 통하여 그 절망적인 상황과 불안한 상황을 다시 보면 극심한 절망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사도바울은 언제나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훌륭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늘 고민하였습니다.
자신이 그와 같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에 대하여 그는 늘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하였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며 고백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31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역설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처럼 힘든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를 통하여 저들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니었는데, 사람을 보는 제 눈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저들을 보면 저들도 나와 똑같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정말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편히 사는 것이 무조건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일도 아닙니다. 무조건 편히 사는 것만 추구하다보면 우리들은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지고, 정신도 약해지고, 신앙도 약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친히 모범을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삽시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거기에 생명과 축복과 상급과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