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0-16장
순종의 복, 신명기 28:1-6, 182장
몇 해 전에 package로 여행을 다녀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많은 종류의 사람들과 같이 섞여서 다니게 되는데 몇 분들이 불평 불만을 이야기 하니까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계속해서 툴툴대니까 나중에는 피하게 되고 같이 여행하기가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불평불만하는 그런 사고로는 스스로도 불행하고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불행제조업자들이 되고 맙니다. 구제불능입니다.
들어왔던 복도 다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자신이 처한 처지의 의미나 가치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것,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거기에다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욕망지향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고 병의 원인인 것입니다.
“이것만 바라는대로 되면 나는 행복해 질 것이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것만’이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보면 이번에는 또 방향을 바꿉니다. “저것만 이루어지면...”
‘이것만 이루어지면, 이 하나의 소원만 이루어지면’ 이 사고방식이 바로 불행의 씨앗인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겸허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존재를 겸허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근본이다’라고 버트란트 러셀은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어 평가하고 사는 사람은 항상 자기 성공에 놀란다고 합니다. ‘아 나는 이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복이...’ 자기 앞에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가 놀라면서 삽니다.
그런가하면 반대로 자기를 스스로 높이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놀라며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래 이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닌데,
내게 어찌 이런 불행이...’ 그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에도 오늘 생각을 확 돌리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바라볼 때도 자기를 낮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아주 낮추고 보면 남편의 지금 이대로도 ‘하나님께서 이만한 복을 내게 주시다니..’
그런가하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어쩌다 저런 인간을 만났단말인가. 내가 저런 인간하고 살 사람이 아닌데... 이거 하나님이 실수했나
내가 실수했나?’ 이러고 삽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신명기 11: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선택하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선택은 내게 있습니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에 따르는 결과는 내가 책임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패에서 벗어나는 빠른 길은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실패의 원인을 본인 스스로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부인하고 싶은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실패의 원인을 우선 환경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고, 여건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실패의 원인을 둡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이런 사람들을 종속적 인간이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가능하기만 하면 실패의 원인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책임 전가 심리를 일명 가인 컴플렉스라고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아담의 두 아들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아벨은 정성을 다하여 믿음으로 드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셨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하지 않고 아마도 형식적으로 동생이 한다니까 그저 따라서 제사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이럴 때에 가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얼른 회개하고 정성을 기울여서
제사를 다시 드렸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사가 상달되지 않은 원인은 동생 때문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는 시기와 질투로 마음 끓이다가 마침내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이것이 인류가 지은 두 번째 죄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으로 지은 큰 죄가 바로 가인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자신의 잘못까지도 다른 사람이 잘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실패는 계속되고 악순환은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쓰리고 아프고 찢어지는 괴로움이 있어도 원인을 나 때문이라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종속 변수로 살지 말고 독립 변수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늘 말씀합니다. 복된 환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된 사람이 있고,
복된 존재가 있고, 복된 길이 있다고...
복된 자가 되면 그는 복된 길로 가고 복된 길로 가는 자에게는 복이 따르는 법입니다. 복은 우리가 복된 존재가 되면 자연히 뒤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착각 중에 하나가 복을 쟁취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쟁취해서 얻은 권리, 쟁취해서 얻은 복, 그것이 복이 되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왜요?
복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우리가 받는 것이지 쟁취해서 얻는 것은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복된 사람이 되는 길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가 복되리라,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여기서도 복을 받고, 저기서도 복을 받고, 너뿐만 아니라 네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 모든 짐승까지도 복을 받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복받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삼가 듣는 것, 그것이 비결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꽤 많은 교인들과 같이 지내면서 교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설교 듣는 자세를 보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되겠다’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은 듣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듣는 자세에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격자가 누구입니까? 인격자는 남의 말을 듣는 자세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만나고 나면 또 만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시원치 않은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허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나도 해 봤는데, 말도 안돼’
모름지기 듣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말씀의 능력이 나를 사로 잡아 여호와의 지혜가 내 지혜가 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나의 권능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 장로님 한 분을 아는데 그 교회가 담임목사하고 장로하고 분쟁을 해서 좀 시끄럽습니다. 그 장로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는 설교를 들을 때 50% 밖에 안 듣는다고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듣고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음식으로 비교하면 편식을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상에 오른 음식이면 무슨 음식이든지 가리지 않고 맛있게 먹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대체로 비실비실하는 사람들 보면 그 입이 까다롭습니다.
밥상에 오른 음식은 무조건 맛있게 먹는다 그것이 건강비결인 것입니다.
영적 건강도 먹성이 좋아야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 듣고’ 무슨 말씀입니까? 행여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듣습니다.
내가 잘못 들어서 말씀이 왜곡되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음을 비우고, 내 욕심이나 이상이나 비판 같은 것 다 쓸어내고 아주 순수한 어린아이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1절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듣고 나서 그 들은 것이 다 내 마음에 들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안 드는 것도 있고, 이해되는 것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령입니다.
내 이성적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된 길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똑똑한 것 같지만 병든 이성이라 제대로 작용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경험과 내 지식이 내 결단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다 버립시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문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이 많은데 끝에 가서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아니합니다마는 이성의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기도입니까? 내 이 어리석고 좁은 생각, 내 경험에의 집착, 다 버리고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복된 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가라’하실 때 떠났습니다.
도대체 어디 가서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묻지 않았습니다. ‘떠나라’ 하시니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도저히 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모세에게 맡기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지팡이로 홍해를 내리쳐라’ 내리 쳤습니다.
‘건너가라’ 건너갔습니다.
그 말씀에 대한 순종 자체가 모세의 능력이요, 지혜요, 용기였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들으면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때의 이야기입니다.
100m 달리기가 마침 주일 아침으로 잡혔습니다.
영국에서 국가대표로 출전한 에릭 리들이라고 하는 청년이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실수만 없으면 그는 100m 경주에서 금메달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일에는 달리기를 할 수 없다 하여 그 경주를 포기하였습니다. 당연히 난리가 났습니다.
영국 신문 전체가 그에 대해서 비판을 하였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것이다. 국가의 배신자다. 옹졸한 신앙인이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나는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나가서 금메달 따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며칠 뒤 400m 경주에 그는 자원했습니다. 100m를 뛰는 사람이 400m 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경기장에 나가서 100m 뛰는 솜씨로 총알같이 뛰는 것입니다. 막 뛰니까 보는 사람들이 걱정을 합니다.
‘저렇게 100m 식으로 뛰다가는 심장이 터져서 죽을텐데’
걱정들을 했는데 그는 그 속력으로 내쳐 달려 400m 세계 기록을 내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200m는 내 힘으로 뛰었는데 나머지 200m는 어떻게 뛰었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뛰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의 전차”를 추천드립니다. 1996년 작.
해서는 안될 일을 계속하면서 ‘이 일 안하게 해주세요’하는 것이 기도입니까? 스스로 끊을 것은 끊어버리고 ‘하나님이여,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이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담배 끊었는데 다시 피우지 않게 기도해 주세요.
289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너무 변론을 벌이지 마시고 너무 꾀를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때로는 우직하게, 때로는 고집스럽게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복된 자가 사는 길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복된 자가 되면 보십시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내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내 직업, 내 현주소가 어디냐고 물을 것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는 복을 받습니다. 환경이 복이 아닙니다. 수입이 는다고 복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바 잘 산다고 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된 자가 되고 복된 길에 설 때
그 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이 복으로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자세를 고치고 복된 길에 서서 복된 자의 길을 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을 다시 한번 점검해 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고집대로 살아 왔음을 이 시간
고백드리오며 이제 후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를 택하시고 신실하게 이끌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