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9장
주의 법도, 시편 119:33-40, 200장.
먼저 시편 119편은 총 176절로 이루어진 바울 서신 1권의 분량입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수줍음이 많았던 그는 차마
여자 앞에 나서지는 못하고, 대신 매일 사랑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1년 쯤 지난 후, 드디어 용기를 내어 프로포즈를 하려는 그에게 여자가 결혼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상대는 다름 아닌 매일 편지를 배달하던 우체부였습니다.
사랑한다면서도 만나지 않으면 아무 결실이 없는 것처럼,
말씀을 사랑한다면 매일 읽고 묵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너무 따지고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읽으세요.
그냥 읽으면 주님의 얼굴이 떠오르고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는 Contemplatio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것, 그 만남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만나면서 내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독교를 그 책(the Book)의 종교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 각 종교마다 경전이 있습니다.
이슬람에는 코란이 있고 유교에는 사서삼경이 있으며 불교에는 불경이 있지만 그 경전과 종교와의 관계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종교가 먼저 생기고 경전은 그 후에 생기지만 기독교는 기독교가 있어서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있어서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의 종교입니다.
말씀이 먼저 있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을 보면 “야곱아”라고 부르는데 야곱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사기꾼, 실패자’입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말씀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그러셨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은 야곱이 나중에 바뀌어진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싸워 이겼다!’ 한마디로 승리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패자 야곱을 하나님께서 승리자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지금 나의 삶이 곤고하고 힘이 들어도 실패자 야곱을
승리자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다윗처럼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절망하거나 자신의 삶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 4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우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분명한 나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지식이나 지혜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단순한 도덕적 계율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에 따라서 우리의 몸도 분명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인생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본 자세가 바로 되지 않고는 아무것도 바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공부하는 학생이면 그가 어느 대학에 다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생으로서의 자세가 훌륭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직위이든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에게도 신앙인의 자세가 있습니다.
예배할 때에는 경건한 예배의 자세가 있어야 하고 봉사할 때에는 성실히 봉사하는 봉사의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와 하나님이 만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세를 바로 갖추어야 합니다.
몸의 자세, 마음의 자세가 준비되지 않고는 말씀이 잘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범적인 신앙인을 생각해 보고 지나가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라는 로마군 장교가 등장합니다.
그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주님께서 고넬료에게 말씀하셔서 베드로를 모셔오게 합니다.
온 식구들을 다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나타나자 그 앞에 가서 꿇어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던지 우쭐하기 좋아하는 베드로조차 황송해서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고 절하는 고넬료를 말리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사도행전 10:33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관계를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합니다.
고넬료의 바로 이 말씀 듣는 자세가 성령이 임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다윗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 다윗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신앙의 기본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배우는 자세입니다. 33절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율례의 도’란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이것을 가르쳐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난 날 자신이 실수를 저지른 것은 몰랐기 때문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 하신 말씀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몰라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간구하기를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다 안다고 착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점점 더 우매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 잘 듣고 받아 들이는 마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만이 모두를 잘 안다고 떠들면 인간관계는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본자세는 겸손한 생각으로 마음 문을 열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배우는 마음이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로 말을 하는 편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듣는 자세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는 상대방의 말을 다
듣고 마지막에 가서 말하는 자세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서두를 것 없습니다. 안다고 쉽게 말하지 말고, 쉽게 비판하지 말 것입니다.
끝까지 다 듣고도 잘 모르는데, 미리 짐작하고 서둘러서 저지르는 실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을 바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번 듣고 생각하고 또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몸에 익혀야 하겠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겸손한 마음으로 일생동안 배우겠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자세입니다. 34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지식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이치를 따져가며 공부하는 것은 지식이며,
몸으로 부딪쳐서 배우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론 뭔가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건으로 부딪쳐 보면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이치로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직접 부딪쳐 보고 경험한 순간에야 제대로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깨달음이란 자기 중심적인 아집이 깨어지고 나서야 얻어지는 새로운 지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 그 사건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어리석고 복잡한 생각은 다 지워 버리고 순수한 진리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하여 주십사는 기도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주의 말씀의 길에 행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35절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면 우리 마음의 길이 좋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 고속 도로가 말씀을 듣자마자 거침없이 그대로 들어가면 좋겠는데, 장애물이 많아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다윗은 이미 이런 것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랬기에 주의 말씀이 내게 직행해서 바로 들어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무릎 꿇고 기도했으면 무릎 펴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 진리대로 살지 않을 것 같으면 우리는 그 진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2:26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는 말씀대로 깨달은 말씀, 터득한 진리를 따라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결국 그 믿음은 헛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아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그것은 대체로 신앙생활을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목적은 깨달아 아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완성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데 그쳐서는 안되고 배운 진리를 자기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천할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행함은 믿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행동을 통해서 보여 지고 입증됩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통해서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계명대로 행하게 하소서”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욕망을 좇아 행하던 길에서 돌이켜 이제는 주의 말씀에 주목하면서 그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다 행하셔야 합니다.
오늘의 결론은 40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들은 손 안에 귀한 성경책이 늘 있고 그 말씀이 오늘도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 나가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주님이 나를 만나주십니다.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나를 지켜 주십니다.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며,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서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서 신앙이 더욱 더 성숙해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