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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의 신앙(고린도후서 1:18-20)

   

 

 

      역대하 32-36장, 에스라 1-2장

 

아멘의 신앙, 고린도후서 1:18-20, 453장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성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소망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보통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능, 지식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 

먼저, 지능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IQ 즉 지능지수가 따라가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능과 지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두뇌를 가졌다 해도 그 두뇌에다 많은 지식을 입력시켜야 써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은 머리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공을 하려면 필요한 지식이 두뇌에 입력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attitude가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세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공부할 때에는 공부하는 자세가 좋아야 되고, 일을 할 때에는 일하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하게 임하는 바른 자세가 기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분위기가 나빠서 그만두고 오늘은 날씨가 우중충해서 그만두고, 또 오늘은 나쁜 소식을 들었다고 그만두면 언제 일하고 공부합니까? 

중요한 것은 좀 공부가 안되는 날이라도 책상머리에 진득하니 앉아 있으라는 말입니다. 기분대로 벌떡 벌떡 일어나서는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분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견뎌내려는 바른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능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세 번째 요인인 자세, 즉 attitude라고들 합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지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삶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른 자세’는 보통 주저하지 않는 긍정적인 자세를 이야기 합니다. 

자세는 항상 긍정적이되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헌신을 하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헌신을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주저주저한다는 말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 하려면 화끈하게 신앙에 담겨야.

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현대인들의 이기심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내게 어떠한 이득이 돌아올까? 이득에 대해서만 저울질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이기 때문에 내게 돌아오는 인기, 내게 돌아오는 이득, 내게 돌아오는 명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사도의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바울의 사도권에 정면 도전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부동반해서 다니는데 바울은 혼자 다니니 역시 시원치 않은 사람이다 하는 둥 별의별 비난을 다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에 갔다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닙니다. 이랬더니 또 비난과 오해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을 놓고 말씀합니다.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서 한 것이지 사람의 입장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성실성과 강직함을 거듭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실은 단순함과 통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실한 분들을 뵈면 단순하고 마음이 깨끗합니다. 일이 있으면 힘들거나 많거나 시작해서 끝을 본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꼭 숙제를 잘 안 해 오는 애들이 숙제나 많으니 적으니 말아 많다고 합니다.

바보가 산을 옮긴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한 맹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예수께서 이 맹인을 고치실 때에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지금 진흙을 바른 지점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는 십리길입니다. 4km

보통 사람도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므로 소경은 훨씬 더 걸렸을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무튼 이 사람은 끝까지 믿고 가서 자기 손으로 실로암 물을 퍼올려서 

눈을 닦습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 맹인의 마음은 단순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모함해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할 때에 그는 말합니다. 

요한복음 9:25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여기에 깨끗한 신앙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입니다. 별로 필요치 않은 것을 잔뜩 알아가지고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건강염려증.

어린아이들을 보면 어떤 때에 한참 울다가도 좋은 일이 생기면 언제 울었냐는듯이 금새 까르르 웃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18:3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단순한 마음 거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그 깨끗한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감격 그 자체가 먼저요 설명은 나중에 붙는 것입니다. 감격에 무슨 조건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든 의지와 지식을 다 초월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격, 그 신앙은 경험에 기초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을 체험할 수 없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험에 기초한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론이나 합리적인 변증이 아닙니다. 다만 체험일 뿐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남이 뭐라 하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하셨다는 개인적인 체험, 이 주관적인 경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객관적인 사건이지만 그에게 닥친 체험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여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기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고 하는 참된 신앙적 진리를 보수하기 위하여 로마교황청을 상대로 포고문을 냈습니다. 

그는 그 일로 보름스에서 재판을 받고 바르트부르그(Wartburg)성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중요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기거하던 방의 벽에는 지금도 그때의 잉크자국이 남아있는데 그 잉크 자국은 중요한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유혹을 받았다고 합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교황과 타협하면 쉽게 풀려날 것은 물론 좋은 자리를 얻어 일생을 편히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유별나게 살다 보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자꾸만 유혹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나만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는가, 알아 주는 사람도 없는데. 유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움트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때 마다 그는 잉크병을 던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예하기 위해서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친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실 때도 ‘사단아 물러가라’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6장에서도 베드로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을 듣고는 만류하자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하고 호통치십니다. 

강한 거절이 있고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아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지만 헬라어에서도 그대로 쓰입니다. 성경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이 몇 번 등장을 합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 옮기면 ‘아멘 아멘 레고 소이’가 됩니다.

아멘,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자세요, 진실한 응답이 아멘입니다.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을 두지 맙시다. 

홍해를 건넜다고 하면 건넌 줄로 알아야 합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고 하거든 뜬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면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인간의 메스를 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이성적 비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든지 주시는대로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에 대한 수용이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전적인 수용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많은 백성을 구원하시는 경륜과 큰 섭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섭리 속에 그 경륜 속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때로 힘든 일도 있고 실패도 합니다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 특별한 사랑을 발견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아멘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 14절을 보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의 일생은 아멘으로 시작하여 아멘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멘으로 이 낮고 낮은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그 모진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아멘으로 그대로 받아 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아멘’입니다. 

아브라함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나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에 그는 묵묵히 떠납니다.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할 때에 군소리 없이 바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넘실거리는 홍해를 건너갑니다. 

‘건너가라’는 그 한 마디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적으로 수락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전적으로 위탁해 버립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아멘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시간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이렇게 순종해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일에 복을 주시고 그 일을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아멘의 신앙, 주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아멘으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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