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8-24장
환난 중에도, 로마서 5:1-4, 92장
출장 중에 있던 한 크리스찬이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이 낯선 도시에서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교회가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통정리를 하고 있던 순경에게 교회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순경은 이리저리 가면 교회가 있다고 일러 주었고 그는 순경이 일러준 교회에 가서 예배를 잘 드렸다고 합니다. 많은 은혜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는 그 길에 그 순경을 다시 만났습니다.
“내가 당신이 일러준 교회를 찾아가면서 보니까 도중에도 다른 교회가 많던데 왜 하필이면 그 교회를 소개하셨습니까?”
“저는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여기서 교통 정리하면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더니 그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소개했습니다.” 하더랍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표정, 마음, 그것이 바로 그 교회의 성격이요 그 교회의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확실히 기쁨의 종교입니다.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불교와 유교를 비교해서 설명하기를 보통 불교는 상갓집과 같다고 합니다. 그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인생 무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무상하다, 다 죽고 없어진다고 하는 것이 상갓집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교는 제삿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밤낮 뭐 효도한다고 하면서 제사지냅니다. 유교의 격식대로 살다보면 일 년 내내 제사만 지내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지내는 일에 정성을 다하니 유교는 제삿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상당히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은 비교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확실히 ‘희락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욕망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욕이나 자기 성취로 인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뒤바뀐 것 같습니다.
‘내가 네 소원을 이루어주리라. 그리하면 네가 기쁘리라’
그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마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먼저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기뻐하면 성공하고, 형통하고, 소원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란 어떤 상황의 결과가 아니요, 모든 상황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이것을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율법적 관계가 아니라 은혜적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적으로 살려면 아주 피곤합니다. 죄지으니까 벌받을까봐 걱정이고, 이런 사람들은 얼굴이 필 날이 없습니다. 벌벌 떱니다.
남보다 더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항상 얼굴은 썩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은혜적 관계라고 하는 것은 이것도 은혜요 저것도 은혜요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오직 은혜로 알고 살아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워렌 버핏, 내가 소유한 돈 99%가 주는 기쁨보다 남들을 위하여 쓴 돈 1%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합니다.
화평, 샬롬,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 이것이 기쁨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과 등지고, 하나님과 원수지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살면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고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기쁨의 근본은 하나님과 화목하는데 있습니다.
자,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마는 가령 그가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잘 살았다면 행복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잘되건 못되건, 가난하건, 부하건 그런 것은 행복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에 의해서 우리의 행불행은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어느 탐험가가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아주 희귀한 새 몇 마리를 얻었습니다. 본국의 조류학자들에게 선물하고자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새장에 갇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유난히 시끄럽게 굴면서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고 머리를 찧는 둥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 푸드덕거립니다.
이렇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결국은 새장 문이 열려 새는 망망대해로 도망치는데 성공했습니다. 새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창공을 높이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그 탐험가는 망연자실 빈 새장만을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그 탐험가는 자기 눈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렇게 도망하였던 새들이 다시 배로 돌아온 것입니다.
저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날아올랐는데 망망대해 위에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온 힘을 다하여 간신히 돌아와 갑판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새들에게 이 새장은 감옥이 아니라 안식처였습니다. 망망대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 새장에 있었습니다. 새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선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자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처한 처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이 처지가 무슨 뜻을 가졌는지를 알면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31, 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다시 성경은 좀 더 깊이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의 모든 공로를 배제하고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Sola Fide.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으로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대로 죽어도 주님을 반가이 대할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과 완전히 종말론적으로 화평한 가운데 사는 사람, 이 사람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야 먹는 것도 좋고, 자는 것도 좋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이 화평이 없으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신 다음에 광야생활 40년을 하게 하십니다. 광야의 길로 인도하실 때 그들이 때로는 물이 없고, 식량이 없고, 원수가 쳐들어오고... 여러모로 시달립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은 딱 두 마디였습니다.
하나는 ‘애굽에 종되었던 일을 잊지 말라’ 오리지널 위치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서 너희가 4백 년동안 애굽의 종되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지 않았느냐, 그때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약속의 땅이 눈앞에 있다 들어가도록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늘 똑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이 현실에 집착해서 정신을 못 차릴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고 미래의 약속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2절을 보면 “즐거워하느니라” 합니다. 현재에 즐거워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얻는 그 기쁨, 바로 그 현재적인 영원한 기쁨입니다.
신학 용어로는 ‘eternal now’, 바로 그런 기쁨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인 것입니다. 과거에 주신 은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신분, 약속된 미래,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기쁨을 오늘도 실제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쁨이 충만할 때, 이 기쁨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창조력이요,
생명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의 성경 본문은 좀 더 실제적으로 말씀합니다.
3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
왜? 생각이 벌써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의 목적 하에 있는 목적적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계십니다.
미켈란젤로.
여러분,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저주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을 통하여 나를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중에 계시다, 라고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1:2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왜? 4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오늘 다시 한번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먼저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환난으로 인해서 잡다한 것들이 다 물러갑니다. 잡스러운 생각, 사치스러운 생각, 어리석은 생각 다 제해버리고 순수한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인내는 또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도키메’는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성품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가르쳐본 일 있습니까?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지식을 줄 수는 있으나 성품을 만들어내기는 참 어렵습니다. 사람 바로잡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성품을 바꾸자면 하나님께서 손을 좀 보셔야 합니다.
거저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을 통하여 개인이건 민족이건 내려치실 때에야 비로소 성품이 나옵니다. 아프고 괴롭지마는 이건 유익한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성품을 이룬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그리고 그 그리스도 닮은 성품이 소망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쓸데없는 것 다 끊어버리고 참소망, 영원한 소망,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
순수한 소망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환난이 이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환난이 아주 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그 위대한 인물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는데 이것 때문에 겸손하고 이것 때문에 내가 있다, 이 가시는 나에게 주시는 은혜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기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성품을, 성품은 소망을 그리고 소망을 가질 때 그 영혼이 소생함을 얻습니다. 영혼이 소생함을 얻을 때 그 이성이 밝아집니다.
여러분, 이성이 어두우면 자꾸 절망쪽으로만 생각이 갑니다. 그래서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품, 구원받은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이성이 될 때 밝은 미래가 보입니다.
환한 앞을 향하여 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비록 우리가 이 땅의 이 현실에 삽니다마는 우리는 먼 미래를 바라봅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고난이 있지마는 우리는 고난 다음을 생각합니다.
나치 독일에서 살아남은 어떤 분이 쓴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기차표를 찢든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더냐? 기차가 터널 속으로 지나가게 되어 캄캄해졌더라도
우리는 기관사를 믿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 아니겠느냐, 우리가 터널과 같은 캄캄한 순간을 지나가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히려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할뿐더러 오히려 환난 중에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으로 이 모든 근심을 이기고 어리석음을 이기고 절망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