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6장 – 역대하 3장
새 일을 행하리니!, 이사야 43:18-21, 428장
‘2+2는 무엇이냐고 물으면 보통 사람들은 4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 강남학부모들은 일타강사 현우진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고 할 것이며, 김앤장이라는 로우펌에 물어보면 먼저 문을 닫고 엿듣는 자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 “해답을 어떻게 만들어 드릴까요?”할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대통령 부인은 리투아니아란 나라에 가서 명품샾에 수행원 십 수명을 대동하고 방문하였다고 하는데 방문만 하고 산 건 없다고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어디서 어디까지 진실인 줄을 알 수 없는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말하면 병든 세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에서 아래까지, 젊은이로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어느 사회 어느 구석을 보아도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총체적 타락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대법관,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또 지금 우리는 사회적으로도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물가가 엄청나게 올라 장보기가 겁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 다 어렵습니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꿈을 가진 사람은 소망을 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바울 모두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어두움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안타깝지만 절망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눈에 보이는 절망적인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을 뛰어넘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시편 146:5에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보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 특히 주식이나 코인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들이 주식리딩방.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왜 도박을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까 도박의 목적이 돈이 아니더랍니다.
돈이 목적인 사람은 돈을 따면 더 이상 도박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돈을 딴 후에도 여전히 도박장으로 달려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내린 결론은 “도박을 왜 하느냐?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깊은 목마름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3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선포되었던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머나 먼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끌려온 지 70여 년이 가까워 오건만, 조국 광복의 소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잡혀 왔던 이민 1세대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고국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는 2, 3세대만이 살아 남아 있는 지금, 나라의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무슨 미래가 있고, 무슨 꿈이 있겠습니까?
이 때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이사야가 희망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19절에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새 일’이란 역사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하여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선민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해방시키는 구원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승리의 메시지를 이 아침에 던져 주고 계십니다.
과거에 애굽을 탈출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홍해를 가르셨던 하나님,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셨던 하나님, 광야에서 목말라할 때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희망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누구에게, 우리와 같이 문제투성이인 야곱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절을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은 야곱의 실수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그 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끝까지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그 전제로 18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지난 과거에 붙잡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이 좋았는데, 그 때가 좋았는데”
이런 생각만 하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잘 살지를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광야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고, 물이 없었습니다. 잠 잘 곳도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 백성들 사이에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민수기 11:5-6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공급해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그들의 입에서는 불평과 원망이 나오고,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 오이, 부추, 파, 마늘 생각 밖에 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과거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과거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은 은혜의 하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앞으로 전진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여 불평만 하다가
결국은 광야에서 그 생애를 끝내고 맙니다.
과거에 좋았습니까? 돌아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힘들었습니까? 잊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뒤를 돌아 볼 사람이 아니라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할 사람이다 하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도 다 좋지 못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인을 누이라고 속인 과거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져질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이고, 바울은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매여 살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과거의 그림자 안에 가둬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정관념을 깨는 삶이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고정관념에 빠지면 맨발로 사는 아프리카에 신발을 수출하거나, 추운 러시아에 에어콘을 수출할 생각은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고가 경직된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펼쳐지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기편견과 아집,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고정관념, 즉 자기 편견과 아집에서 탈출해서, 주님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전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새것을 원하면서, 새것을 두려워하여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두가 가장 편하게 느껴지면 버릴 때가 다 된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헌 구두를 버리려면 망설입니다. 이렇게 사람이란 옛것을 편하게 여기고 변화하기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새롭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산꼭대기에 방주를 만든 것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전진해 들어 간 것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새롭고 놀라운 일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약속을 하였으면서도 우리를 왜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도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인생이 그냥 평안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 제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단한 흙에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해에 좋은 밭농사를 지으려면 반드시 땅을 갈아엎어 단단한 흙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밭을 이렇게 갈아엎지 않고는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단단하고 메마른 땅에서 어떻게 좋은 열매가 열릴 수 있겠습니까?
깨어짐이 있어야하고, 부서짐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시편 기자는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19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저는 “반드시”라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반드시” 새롭고 좋은 길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8:16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반드시,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또 우리들이 반드시 믿어야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19절 후반절의 말씀과 20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실 것”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광야에 길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긴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 눈에는 길이 없어 보여도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물이 없고 메말라 보여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꿈꾸고 하나님은 일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할 일은 하나님을 찬양 하는 것입니다.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찬양이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찬양할 때 귀신이 떠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돌면서 찬양할 때 성이 무너졌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할 때 옥터가 흔들리고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찬양으로 여러분을 묶고 있는 악의 사슬들이 풀어지고
찬양으로 여러분 앞에 견고하게 서 있는 성들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너희들은 무능력하고 무기력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 하나님이 친히 새 일을 시작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새 일을 행하시면 우리의 가정에도, 직장에도,
사업장에도, 교회에도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과거에 붙들려 살지 말고 함께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을 기대하십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새 일’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이제부터는 광야에 샘물이 나고 사막에 강이 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보고 그 새 일에 참여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