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3장 ~ 역대상 4장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1-5, 365장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와 말씀하셨고 그것이 모세의 삶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송국에서 계속 전파를 보냅니다. 누군가 라디오를 가지고 주파수를 잘 맞추면 뉴스도 들리고 음악도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라디오가 있어도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주파수를 잘 맞추지 못하면 절대 들을 수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주파수를 잘 맞추지 못함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2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의심으로 가득하여 마음을 닫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완고한 고집으로 거부하는 자세로 있으면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잘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설교를 듣거나 기도 할 때, 성경을 읽는 중에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사로잡으면 의심 없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 순간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시고 계시구나! 하고 얼른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겠나이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 듣고 나면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출발점이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반응한 사람들은 모두 새롭게 되어서 대단히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부름 받는 시간 이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삶은 사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순간부터 공적인 경기가 시작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름을 받기 이전을 잘 설명 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75세 이후의 삶만 그려져 있고, 그가 전에 무엇을 했는지, 선하게 살았는지 악하게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그의 태도 하나, 하나를 생중계하듯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80세에 하나님께 부르심 받기 이전의 삶은 짧게 언급이 되고 이후의 삶에 대하여 출애굽기, 민수기를 통하여 전해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에 대해서는 꽤 자세히 말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30년의 세월에 대하여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저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지금,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난 다음 어떻게 살았느냐?
어떻게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은 자랑할 것도, 또 부끄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파스칼이라는 프랑스의 철학자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의인, 위인, 성자 이 세 단어를 믿지 않는다. 세상에는 죄인 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대통령에게, 신부들에게, 목사들에게 성자를 기대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 그 기대를 깨버리시기 바랍니다.
역사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다 같은 죄인입니다. 다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순종하느냐, 그것이 문제가 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주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모세는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는 어려운 과거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잃어버렸던 과거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됩니다.
여러분, 쓰라린 과거가 있습니까? 오늘 주님과 만나는 순간
하나님의 크신 경륜과 지혜 속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마흔의 나이에 찬송을 부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찾아와 주셔서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 당하신 고난이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같지 않는 나 같은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왜 부르시는 것일까요?
예레미야 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단테의 신곡에 의하면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성경은 천국을 묘사할 때마다 새 것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천국에서 부르는 노래를 새 노래라고 하고,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새로움이, 참신함이, 신선함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새로운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소명을 받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십니다.
하나님 앞에 그는 섰지만 그는 내가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한 도망자입니다.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40년간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부자 집에 장가가서 잘 사는 사람 한 명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요즘에도 처가살이를 하는 사람에게 별로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처갓집에 얹혀 40년 동안 양을 치고 살았습니다. 같은 남자로 말하지만 별볼일 없는 남자입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어느새 나이 여든이 되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만 40년, 목자 생활에 익숙해 있습니다.
이제 불편도 없고 원망도 없습니다. 그저 손익은 일에 끌려서 그렇게 그렇게 이 골짜기 저 들판으로 양을 몰고 다니며 살다가 그렇게 생을 마치기로 마음을 굳힌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엄청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나이 80세, 실패한 사람, 좌절한 사람, 인생으로서는 끝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너무나 두려운 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라 하면 너는 갈 일이다, 네 과거도 알고 네 미래도 알고, 네 현재의 부족함도 안다,
다 안다, 그리고 처음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 과거, 네 미래, 네 신분, 네 자존심, 다 벗어버리라, 함입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행하신 일은 천지개벽도 무슨 기적도 아닙니다.
오직 조용하게 ‘한 사람’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르고 있었지만 벌써 80년 전부터 나일강에서 건지시고 바로의 궁에서 40년 공부하게 하시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게 하시어 지도력을 키우신 것입니다. 80년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심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인생을 놀라웁고도
아름다운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한 위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모세의 나이가 80세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인간적으로 볼 때에 80세는 희망이 사라지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숨어서 지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내시겠다는 어마어마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여러분이 모세라면 믿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믿음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똑 같은 말씀을 몇 사람이 같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큰 축복을 받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4:2에 보면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믿음과 결부시켰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내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게 느껴지지만 내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놀라운 일이 내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복받아서 팔자를 고치는 종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우리 교회에 와서 팔자를 고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떠나야 합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모세는 목동의 신분을 떠났고,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의 삶을 떠났습니다.
기독교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약한 자를 쓰셔서 강하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택해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하게 하시고.
떠나면 망할 것 같은데 사실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쫓겨나고 밀려나서
고향을 떠났는데 얼마 후에는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미지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삽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해 출발하려고 할 때에 항상 ‘두려움’이란 것이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서 떠나지 않을 핑계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편하게 해 주는 데에 머문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업적인 것이나 공부나,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됐지’ ‘이 나이에 내가 무슨 새로운 일을’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되지’ 미래에 대한 도전이나 꿈을 접고 사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학생이 공부를 잘 하려면 놀기만 좋아하던 그 습관, PC에서, 게임에서 떠나야 합니다.
사업가가 성공하려면 게으름에서, 두려움에서 떠나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본토, 친척, 아비 집’ 이 모든 것들은 아브라함에게 익숙한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누리며 살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 익숙한 것에서 떠나지 않고는 결코 새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익숙한 것은 우리를 안주하게 만듭니다. 발전적이지 못하게 합니다. 안주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모릅니다. 변화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마음이 우리를 뒤처지게 합니다.
그런데 떠남은 아쉬움이 따르고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이는 결코 새로워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해 부지런히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성능 좋은 배가 있을지라도 배가 돛을 올리고 항구를 떠나서 바다로 향하여 나가야만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좋은 배를 항구에 묶어만 둔다면 그 성능 좋은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떠나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앞서 갈등을 했습니다. “나는 말을 못합니다. 입이 뻣뻣합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과 갈등이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갈등을 믿음으로, 순종으로 넘어섰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바꾸거나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려고 할 때 많은 갈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갈등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떠나라면 떠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모세는 말씀을 따라 떠났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순종하며 첫 걸음을 떼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그 크고 놀라운 축복을 성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