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6-22장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22-30, 521장.
어떤 분이 사업상으로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아침에 여러 가지 일로 약속 시간에 늦어 급히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습니다.
택시를 내리면서 급하게 택시비를 주고 허둥지둥 약속장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meeting이 끝나고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에 만원 짜리 지폐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아 누가 흘리고 갔구나’하고 그 옆을 보니 운전면허증도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이 자기 얼굴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아 내가 너무 서두르느라고 그만 이렇게 돈도 흘리고 면허증도 흘리고 다녔구나’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떻게 이 서울의 많은 택시 중에서 아까 타고갔던 택시를 또 탈 수 있느냐였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했다면 면허증을 다시 내어야 하고, 카드도 분실 신고하고 새로 만들어야 하고 아주 복잡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오늘은 참으로 재수 좋은 날이다. 아주 행복한 날이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아, 오늘은 참으로 재수좋은 날을 보냈다. 행복한 날이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해 집니다.
‘이렇게 재수 좋은 날인 줄 알았다면 로토라도 한 장 사놓을 걸’
그만 모처럼 가졌던 좋은 기분이 싹 없어졌습니다.
오늘은 참 행복한 날이다. 좋은 날이다 거기서 끝냈으면 좋으련만,
마지막에 욕심이 많아져서 일껏 밝아진 마음이 어두워지고, 모처럼 행복했던 마음이 불행해지고...
‘차선은 최선의 원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최선이신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차선, 3선, 4선을 찾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회퍼의 유명한 신학명제는
“값싼 은혜가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의 신학의 주제입니다.
흔히들 복을 달라고 비는데 그 속에 예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복된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복된 길을 다 가르쳐주셨거늘 다 마다한 채 손바닥 내놓고 무작정 복주십사, 몸부림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일생은 초점이 십자가에 맞추어져 계십니다.
마태복음 16:2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에 생명의 길이 있다,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훈련이 없는 은혜, 훈련과정을 무시한 은혜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도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때 훌쩍 책장을 넘기듯이 하루아침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십 년이라고 하는 긴 훈련 코스, 이 과정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사실 공부에도 지름길은 없습니다. 공부에 요행수는 없는 것입니다.
빨리 빨리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깨닫고 또 깨닫고.
그래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궁뎅이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격이란 전기 스위치를 건드리면 반짝하고 불이 들어오듯이, 컴퓨터를 클릭하면 금새 눈앞에 화면이 뜨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인격은 많은 시간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훌륭한 인격으로 키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거늘 요사이는 모두가 그저 급하기만 합니다. 무엇이든 automatic으로, 자동으로 데꺽데꺽 이루어지기만을 바랍니다. 이 조급함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귀한 진리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훈련과정, 이 시련, 이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복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에 대하여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성에 성문이 있었습니다. 큰 성문이 있고 이는 아침에 열었다가 저녁에 닫는 문입니다. 그러면 밤중에 멀리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성 안에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따로 비상구를 만들었습니다. 성문 곁에 개구멍같은 조그만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바늘 귀문’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좁은문입니다.
말을 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짐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교만한 자도 안됩니다. 오직 겸손한 사람, 마음을 비운 사람만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로 들어가려면 버릴 것이 많습니다. 교만, 자존심, 욕심도, 명예도 다 버리고 오직 순순하게 생명위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의미심장한 질문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23절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잘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앞 18-21절에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힘쓰라’는 말은 ‘죽을힘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make every effort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권투시합이나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 선수와 싸울 때 죽을힘을
다해 싸울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구원의 문,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문제들과 죽을힘을 다해 싸우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 기적을 바라고, 축복을 바라고, 형통을 바라고, 출세를 바라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따르면서 예수님의 교훈을 잘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 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하십니다.
이런 말씀 하시는 것을 보고, ‘아 내 소원성취, 아무래도 어렵겠는데...’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해 본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에 예수님께서 이만큼이다, 저만큼이다, 10%다, 20%다 하시지 않고 딱 한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어떻게 해야 잘 살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다 저 할 탓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여기 있는데 이것은 하지 않고 그냥 쉽게 가려고 해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기도도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우리 셀 리더가 해 주시겠지?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중도에 하차합니다. 모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출발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다가도 못하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25-27절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만들고 그와 그 가족들과 짐승들이 다 방주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문이 닫혔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문은 한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문이 닫힌 후에 도착하여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열어주소서” 그러나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그때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러나 그들은 단지 구경꾼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방관자처럼 살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바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성경공부는 무슨 성경공부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예수님은 구경꾼들을 가리켜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십니다.
너와 함께 나가 음식을 나누었다고 해서 So What?
음식 같이 먹었다고 그게 구원의 조건이냐?
total commitment, 전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좁은 문은 우리 앞에 잠깐 잠깐씩 열립니다.
열렸을 때 들어가야 됩니다. 일단 닫히고 나면 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 할 수 있을 때 하여야 됩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일할 수 없습니다. 항상 열려 있는 문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름만 가진 교인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늬만 교인이어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피상적인 교인, 헌신이 없는 교인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점심 식사를 하는데 옆에 젊은 직장인들.
헬스 끊어 놓기는 했는데 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헬스클럽 주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운동기구가 있다고 건강해 집니까? 아니올시다.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제가 운동을 열심히 할 때 아무 운동 기구도 없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기구가 필요 없습니다. 내가 하겠다는 의지, 결단이 중요한 것입니다.
운동은 나 스스로가 하여야 내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봉사하고 내가 헌신해서 그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하고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하십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조용히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여러분,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존경받는 분들, 하나같이 한평생 외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휘청휘청하고 넓게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좁게 산 사람들입니다.
먹을 수 있다고 다 먹고, 잘 수 있다고 다 자고,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넓은 세상을 좁게 사신 분들입니다. 스스로 좁혀 가면서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주일 성수 하는 것과 십일조 하는 것도 다 좁은 길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미국의 John F Kennedy 대통령의 유명한 연설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 훗날에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서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는 용감하였는가, 너는 성실하였는가, 너는 헌신하였는가?” 우리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과연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넓게 산 사람은 유구무언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넓은 세상을 스스로 좁혀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자신의 노력으로 오히려 좁혀가며, 좁혀가며 살아라.
주님의 이 음성에 순종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기뻐하며
좁은 문으로 기꺼이 들어가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