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엣적에
산길을 가던 나그네가 함정에 빠져 고생하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했습니다.
호랑이는 나그네를 보자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나그네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호랑이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호랑이는 숨을 돌리더니, 자기를 살려준 고마운 나그네한테 뜻밖의 요구를 합니다.
‘내가 여러 날을 굶어서 몹시 시장하니 부득이 너를 잡아먹어야 되겠다’
나그네는 몹시도 분하고 억울해서 재판을 받아 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호랑이도 찬성을 하여 둘은 토끼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둘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토끼가 호랑이를 보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너를 구해 주기 전에 너는 어떤 처지에 있었더냐?’
호랑이가 답합니다. ‘아, 저기 있는 구덩이에 들어가 있었지. 뭐’
호랑이의 대답을 듣자 ‘그래? 그렇다면 현장 검증을 해 봐야겠다. 그 구덩이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한 번 그 실연을 해 보아라’
그러자 호랑이는 함정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 ‘이렇게 하고 있었단 말이야’
토끼는 호랑이를 쳐다 보면서 판결을 내립니다.
‘너는 거기서 좀 더 고생을 하다가 죽어야겠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가르쳐 주는 민담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을 맺습니다.
성경은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결코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가령 어느 정도의 선행을 해야 한다든가, 어느 정도의 구제를 해야 한다든가, 고행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말해주는 투쟁사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기술해 주는 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그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 우리 크리스찬들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가 되면 지내온 일생을 회고하면서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좀 더 즐길 것을’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 이제껏 불평과 짜증, 원망으로 산 것.
지금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즐기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뒤돌아 보아라”
다른 하나는 ‘좀 더 베풀 것을’
돈을 좀 더 많이 벌지 못했다고 해서 후회하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부자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후회하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가난하든 부하든 간에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베풀 것을, 좀 더 줄 수 있었는데, 좀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하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좀 더 참을 것을’ 좀 더 참을 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불가피하다고,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때에 좀 더 참을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여유있게 참았더라면 운명이 달라졌을 것인데, 지금과 다른 생을 살 수 있었는데, 그것을 참지 못하고 그만 일을 그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 됨됨이가 성숙하고, 그릇이 크고 어른스러운 사람을 존경하고 추앙합니다. 그런데 그 성숙과 위대함의 척도가 되는 것은 그의 지식도,
그의 능력도, 그의 소유도 아닙니다.
사람의 크기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내의 정도에서 가름됩니다.
큰 사람, 그것은 얼마나 넉넉하게 참는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그것이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에 대하여 못된 말을 많이 했습니다. 참 참기 어려운 비난도 많았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서에 잘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넉넉히 참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시시한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잘 참았습니다.
바울이 사도됨의 표적으로 ‘내가 너희들을 참지 않았느냐’고 말씀합니다.
참는 쪽이 어른이거든요.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든지 고통과 큰 사건에 접하게 되었을 때 보이는 반응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기피형입니다. 은둔형입니다.
어떤 어려운 사건을 만나면 도망을 가려고 합니다. 숨어 버리려고 합니다.
가족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무조건 이렇게 도망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자포자기, 절망형입니다.
‘아이구 망했다, 다 망해 버렸다’하며 스스로 절망하고 자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다 끝났다고 하면서 절망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세 번째 유형은 책임전가형, 쉽게 말하면 원망형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잘못된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누구 때문이요, 누구 때문이요, 내 탓이 아니라.
더 나아가 남을 원망하고 이 사람 욕하고 저 사람 욕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은 죄가 이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저들이 광야에 엎드러졌느니라 합니다.
원망이 엄청난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유형이 성숙형입니다.
억지로 견디는 것도 아니요, 원망하는 것도 아니요, 절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 없는 가운데서 생각을 깊이 합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성숙한 인격으로 깊이 생각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통은 누구나 동일하게 당하는 것이지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다 다르다’고 합니다, 똑같은 모양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자세가 다릅니다. 마음가짐이 다릅니다. 태도가 다릅니다.
그 결과로 똑같은 고통을 당해도 운명이 다릅니다. 성숙한 사람은 성숙한 자세로 고난을 견딜 뿐만 아니라 인생 역전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0장 18절을 보면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다른 일로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꼭 괴로움을 당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겠다. 하십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실패보다, 멸망보다, 고통보다 중한 것입니다.
사람은 깨달음으로써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더없이 귀한 것입니다.
시편 119:71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하다. 왜? 이로써 주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함으로써 말씀을 듣게 되었고, 고난 당함으로써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고난 당함으로써 말씀을 믿고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지 않고 아주 간단하게 한 가지로 말씀합니다.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힘이 없어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참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시기 때문에 참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하신 말씀대로 이 현실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현실에서 주님께서는 저 너머에 있는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시면서 그 고통과 굴욕을 참아내신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 조롱과 욕을 잘 참으십니다.
그렇거늘 누가 무엇을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동시에 오늘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죄인을, 거역한 자들을 참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어리석은 사람을 참아 주셨습니다.
불신앙의 사람도 참아주시고, 거역하는 사람도 참아주시고 다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참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는다는 것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또한 참는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좀 유치하게 보여도 기다려 주십시오. 이 인내가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피흘리기까지 참아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얼마나 참으셨는지.
내가 곁길로 갈 때, 내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 내가 짐짓 죄의 길로 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참으셨습니다. 오래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나의 미련함, 나의 불신앙, 나의 게으름, 나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도 하나님께서는 오래오래 참아주셔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할 말 있습니까? 동시에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몸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내 이웃을 향해서 참아야 됩니다.
끝까지 인내하여야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상 중에 베긴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이스라엘의 수상일 때에 이스라엘에 6일 전쟁이 일어났는데 5백만에 불과한 이스라엘 인구를 가지고 3억을 상대로 싸워서 승리합니다.
이 분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합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비결은 명령에 있습니다. 우리 이스라엘의 장군이면 부하들에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명령을 합니까?’ ‘그것은 나를 따르라’라는 명령입니다.
자기는 뒤에 있으면서 ‘앞으로 가라’하는 따위의 명령은 이스라엘에는 없습니다. 다만 나 스스로 먼저 가면서 ‘나를 따르라’할 뿐이지요.
바로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제 우리가 그 뒤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한 우리들을 피흘리까지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며 주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