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6-12장
6장
1-11절 법궤의 운반과 웃사의 죽음,
6, 7절 잘못된 열심,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김
12-23절 예루살렘에 옮겨진 법궤
7장
1-3절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
4-17절 다윗 언약 13~16절 다윗 언약
18-29절 다윗의 감사 기도
8장
1-14절 다윗의 정복 사업 6절 14절
15-18절 다윗의 통치 조직
요압 17절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 사두개인
9장
1-8절 사울의 유족을 찾는 다윗
9-13절 므비보셋을 선대하는 다윗
10장
1-5절 하눈에게 모욕당한 다윗의 사절단
4절 중동 볼기, 다리가 시작되는 부분, 즉 엉덩이 부분을 가리킴.
6-19절 암몬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
암몬, 아람 동맹군 결성
11장
1-5절 밧세바를 범한 다윗
1절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5절
6-13절 죄를 감추려 획책하는 다윗
14-27절 우리아를 살해하는 다윗
12장
1-14절 다윗을 책망하는 나단
15-25절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
20절, 22절 여디디야
26-31절 랍바 성 함락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내 인생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때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무엇이 가장 귀하고 소중할까요?
내 가족에게 남길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요?
주님 앞에서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가장 귀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며,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가슴 저리도록 후회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혹은 병으로, 자식을 일찍 보낸 부모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식에게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아픔입니다.
따뜻한 밥을 한 번 더 해 주지 못한 아픔이, 좀 더 사랑해 주지 못한 아픔이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큰 후회로 남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부모님이 세상을 뜨셨을 때, 자식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살아계실 때, 부모님께 좀 더 좀 더 효도하지 못하고, 좀 더 잘 모시지 못한 아픔이 자식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많은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지만, 가장 큰 아픔을 남기게
만드는 것은, ‘좀 더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사랑이 에로스냐, 아가페냐,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용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에로스는 항상 나 중심입니다. 나를 위해서 저를 사랑합니다.
내게 저 사람이 필요해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괴롭히고, 남편을 괴롭히고, 아내를 죽입니다. 다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가페라고 하면 내가 사랑하는 그 대상으로 중심이 옮겨갑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할까?를 생각하면서 배려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예언하는 능이 있다 해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선행을 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고린도전서 14장 은사장에서 은사를 구해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요한 또한 요한일서 4: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주위 사람을 본의 아니게 실망시킨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직장동료를 실망시키거나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실망시키고 자식이 부모를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남을 실망시키면 자괴감이 들어 상대방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점점 보이지 않는 담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는 저 사람을 몰라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새벽닭이 울자마자 극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밖으로 나가서 통곡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 혹시 그들이 자기도 죽이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말씀대로 살면 손해볼까 봐!
며칠 전에 자동차에 이런 스티커가 붙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If God seems to be far away, guess who moved.” (만약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면, 누가 움직였는지 생각해 보라.)
누가 움직였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늘 제 자리에 계신데 우리가 멀리 도망가고 움직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도망가고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망을 갔던 제자들은 자신에게 실망 했습니다. “아, 이제는 끝났다. 예수님께서 나를 좋아하실 리도 없고 내가 예수님을 볼 면목도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낙심한 나를 다시 쓰시지 않을 거야. 그러니 갈릴리 바다에 옛날처럼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로 가서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업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고기 잡는 일이 전문이었는데 지금 와서는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심한 허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 쓸모없는 존재야.”
이렇게 낙심하고 힘없이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고기를 얼마나 잡았소?” “고기는 무슨 고기, 한 마리도 못 잡고 밤새 고생만 했소.” “그러면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져 보시오.”
피곤해서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말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 153마리를 그물에 가득 차도록 잡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떠나 생업으로 돌아간 베드로나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오히려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빵과 물고기로 먹을 것을 준비해서 “나와서 나와 같이 조반 먹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리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여러분에게 다가오셔서 말을 거시고,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혹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했거나 하나님을 실망시켰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여러분을 찾아 오셔서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죄인입니다.
계집종 앞에서 벌벌 떨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죄로 말하면, 하나님을 저주한 죄요, 씻을 수 없는 죄요, 가증스럽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죄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 번째로 찾아오시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죄책감에 눌려, 절망하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 그때 내가 너를 빤히 쳐다보는 앞에서 나와 상관이 없다고 했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무려 세 번에 걸쳐 행해졌습니다.
네가 나를 버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네가 어떤 죄를 지었고, 과거에 네가 나를 부인했고, 과거에 네가 큰 죄를 지었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베드로만 주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저 역시 주님을 부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요나 선지자만 주님을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원망했었고 불평했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여, 멀리 멀리 떠나던 죄인입니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시는 까닮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런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서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네가 젊었을 때는 띠를 띠고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다녔지.
이제 머지않아 딴 사람이 와서 꽁꽁 묶어서 죽음의 길로 데려갈 것이다.”
그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여러분의 고난, 심지어 죽음마저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을 할 때도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참을 일이 아닌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기도 하고 견디기도 하고 희생하기도 하며, 심지어 목숨을 바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상을 받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 때문에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부터 늘 짝이었습니다. 어디든지 같이 갔고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시켜도 두 사람에게 꼭 같이 시키셨습니다.
변화산에 오르실 때도,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갈 때도, 유월절 저녁을 준비할 때에도 베드로와 요한은 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자 요한은 어떻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네가 상관할 것이 아니고 너는 나를 따르라.” 딴 사람은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나를 향한 섭리, 여러분을 향한 섭리, 옆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다릅니다.
여러분은 언제 낙심합니까?
여러분의 인생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비교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교만해집니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비교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과 비교하면 교만해지거나 낙심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가 풍족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1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처럼 사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있음을 아십시오.
그리고 그 계획은 언제나 선하심함을 믿으십시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뭐라고 하든지, 내가 가야 할 그 길을 꾸준히 주님과 함께 걷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일편단심으로 환경과 여건의 변화와 상관없이 끝까지 주님을 섬기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서로 서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가정에,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가난도, 시련도, 아픔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힘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약한 것을 감싸주고,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고달픈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 또한 주님을 사랑하며
의지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새롭게 펼쳐질 것입니다.
완전히 망가졌던 베드로의 인생이, 주님과 더불어 다시 시작되었던 것과 같이, 내 인생도 그렇게 새 출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과거의 일에 매달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묻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질문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런 주님의 질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당당하게 고백하며, 주님께로 힘차게 달려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